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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환향년(還鄕年)-6

by 아마도난

길손들로 가득한 주막에 나귀를 탄 여인과 등짐을 진 사내가 들어섰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고개도 들지 않고 점심을 먹었다.


“며칠 전에 서낭당을 지나다 당산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여인을 봤다네.”


“나도 봤어. 양반집 아녀자가 정조를 잃었으니 집안 망신이라며 그 아비가 자진하라고 강요해서 목을 맸다지?”


“세상이 어쩌려고…. 마누라나 딸을 지켜내지 못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불쌍한 처자식만 죽음으로 내몰고 있으니….”


“그런 인간들이 양반이라니…. 난 양반들이 싹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러면 세상은 살 만할 텐데 말이야.”


“맞아. 다른 건 몰라도 양반들은 모두 없어져야 해. 이 나라에서 양반 덕에 잘살던 때가 있었어? 왜란 때는 도망치기 바쁘더니 난리 끝나고는 난리 때 손해 본 재산 찾아야 한다고 백성들을 얼마나 쥐어짰어? 우리같이 돈 없고 뒷배 없는 백성들은 난리가 나도 죽고, 난리가 끝나도 죽어나잖아. 그러더니 지금도 하는 짓 좀 봐. 오랑캐에게 끌려가서 정조를 잃었으니 죽어야지, 왜 살아서 돌아왔느냐며 마누라나 딸, 며느리에게 죽으라고 강요하잖아.”


“더 가관인 게 뭔지 알아? 그렇게 억지로 죽인 처자식을 앞세워 나라에서 정려문을 받아내잖아. 딸자식 목숨값으로 아들 출셋길 열어주는 미친 세상이란 말이야!”


“어젯밤에 강 대감댁 외동딸도 강물에 몸을 던진 모양이야. 강가에서 신발과 치마가 발견됐다며 난리가 났던데?”


“강 대감댁 딸? 그 아씨도 집안을 살렸군.”


보부상들의 이야기를 등 뒤로 하고 젊은 여인과 사내가 서둘러 주막을 떠났다.



강 대감의 집에서 소동이 있던 다음날 새벽, 효종과 마님은 창고에 갇혀 있던 막돌과 별채에 감금된 효생을 은밀히 불러냈다. 마님은 흐느끼며 효생의 손을 잡았고 효종은 막돌에게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이 속에는 훈도방에서 구해온 조씨 가문의 족보와 어머니가 주신 패물이 들어 있네. 집과 땅을 마련하기에 충분할 터이니 가지고 먼 곳으로 떠나게.”


훈도방은 활자를 주조하는 주자소와 서적을 인쇄하는 교서관을 중심으로 인쇄업자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막돌이 영문을 몰라 멀뚱한 표정으로 마님과 효종을 번갈아 쳐다봤다. 마님은 막돌에게 효생이 정조를 잃은 자책감으로 강에서 투신한 것으로 할 테니 강가의 언덕에 효생의 신발을, 언덕 아래에 치마를 남겨놓아 자진한 것처럼 만들라고 했다. 마님의 말을 받아 효종이 말했다.


“조씨 집안 항렬자가 양(亮)이어서 자네 이름을 다시 밝아졌다는 뜻으로 환양(還亮)이라고 지었네. 조환양, 이것이 자네 이름일세. 그리고 오늘이 자네와 효생이 진정으로 고향에 돌아온 날이 되는 걸세. 올해가 환향년(還鄕年)이란 말일세.”


막돌이 감격하여 무릎을 꿇으려 하자 효종은 그를 바로 앉게 했다. 효종의 말투도 바뀌어 있었다. 막돌이 효생의 남편이 되었으니 주종관계가 아니라 매제로 대우한 것이다. 막돌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양반 이름을 얻었고 실질적으로 고향에 돌아온 날이라 하니 이보다 더 감격스러울 수 없었다. 그는 효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절을 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얼굴이 퉁퉁 부은 막돌은 눈이 퉁퉁 부은 효생을 나귀 등에 앉히고 집을 떠났다. 마을을 벗어나 고갯마루에 이르자 막돌이 말했다.


“이곳에서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하시지요.”


효생은 자기 때문에 부모 형제와 생이별하게 됐다며 미안해하는 막돌에게 말했다.


“그러지 마셔요. 부모님을 잃은 대신 서방님을 얻었으니 저는 기쁘답니다.”


둘은 부모님이 있는 방향으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가족들이 있는 고향 집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들은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강가 언덕에 효생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붉은색 치마는 언덕 아래로 던졌다. 그 치마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담았다.


주막을 떠나 인적이 뜸한 숲길에 이르렀다.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효생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막돌을 불렀다.


“서방님!”


“네, 아씨.”


“아이, 아씨가 뭐예요. 부인 그래야지.”


“부…인?”


“우린 이제 남편하고 부인이라고요. 그러니 부인이라고 불러 보세요, 서방님!”


“부, 부, 부인!”


“네, 서방님.”


효생이 까르르 웃으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업어주세요.”


“업어달라니…요?”


“묵던에서는 자주 업어줬잖아요. 어서요.”


묵던에서 효생은 울적해지거나 고향이 그리울 때면 막돌에게 업어달라고 조르곤 했었다. 효생은 막돌의 등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가끔은 잠들기도 했었다. 막돌은 효생을 나귀에서 내려오게 하고, 지고 있던 봇짐을 나귀 등에 얹은 다음 효생을 업었다. 막돌의 등에 업힌 효생이 즐겁게 재잘거렸다.


“서방님 성함이 뭐죠?”


“조환양입니다, 부…인.”


“사랑합니다, 조환양 나리.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효생이 환양의 목에 바짝 매달리며 애교스럽게 대답했다. 묵던에서 울적하거나 힘들 때마다 막돌에게 업혀 응석을 부리고 쌓인 응어리를 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때마침 두 사람의 앞날을 축하라도 하는 것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끝


(진주남강문단 21호,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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