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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그림자

by 아마도난

젊은이라는 말에는 ‘미래’라는 단어가 함축되어 있고, 미래에는 ‘가능성’과 ‘도전’이 함께한다. 그래서 ‘젊은이’는 축복이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이들도 ‘미래’라는 단어의 축복을 누리고 있을까? 집값이 너무 올라 평생 월세로 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고, 정규직이나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해서 능력보다는 ‘운’이 좋아야 한다는 인식도 커지고 있는 세댄데…. 부모 세대가 젊은이일 때는 월급으로 방을 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다. 이런 소박한 소망이 젊은이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가 된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는 기존의 서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노력하면 된다’가 아니라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느냐’가 운명을 결정하는 구조라고 생각한다. 주거는 사다리가 아니라 벽이 되었고, 교육은 기회의 문이 아니라 신분을 고착시키는 장치로 변했다. 기성세대와 정치권은 젊은이들에게 책임만 요구할 뿐 권한과 미래는 나눠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나 자신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라는 정서가 강해졌다. 생각이 바뀌어서일까? 미래를 한국 안에서만 찾지 않고 국경 너머에서 찾으려는 분위기도 널리 퍼졌다. 한국과 해외를 오가는 삶을 지향하는 젊은이가 많아진 것이다.


이때 검은 그림자처럼 등장한 것이 ‘유혹’이다. ‘월 천만 원 보장’, ‘합법적 온라인 업무’, ‘숙식 제공’과 같은 문구는 피로와 불안을 짊어진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일자리로 보이던 제안이 조직적 범죄의 통로가 되어버렸지만, 그 순간조차 그들은 자기를 합리화한다. ‘잠시만 일하고 돌아오면 돼.’, ‘다들 하는 일이라는데, 괜찮겠지.’ 그렇게 시작된 한 걸음이, 되돌릴 수 없는 길이 되었다. 단번에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 현실을 잊게 해주는 쾌락적 소비가 위험하다는 것은 그들도 알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흔들렸을 것이다. 유혹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벼랑에서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붙잡고자 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든 범죄에 가담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이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위험을 감수하며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높은 물가와 불안한 고용, 그리고 ‘공정’이라는 말이 무색해진 구조적 불안 속에서 최소한의 삶의 기반조차 마련하기 어렵다는 절망감이 배경에 있는 것은 아닐까? SNS를 통해 끊임없이 비교되는 현실이 그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리지는 않았을까? 젊은이들이 검은 유혹에 넘어간 것은 돈 문제뿐만 아니라 존재의 문제도 걸려있기 때문이다. 희망이 멀어질수록 유혹은 더 가까이에서 속삭인다. 많은 젊은이가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범죄의 유혹에 빠진 이유다.

버티는 것이 무모해 보일 만큼 팍팍할 때, 사람은 순간의 위안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흔들림은 나약함이 아니라, 살아남고자 하는 조건반사의 다른 이름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 젊은이들은 절망 속에서도 아주 적은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아마도 이 나라에서 가장 단단한 세대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경제가 다시 단단한 토양이 되어 젊은이의 뿌리를 지탱해 줄 날이 온다면, 그때는 유혹이 지금처럼 날카롭게 젊은이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하리라.


그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젊은이의 흔들림을 이해하는 마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을이 깊어가는 저녁, 창밖을 바라본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어둠은 불빛 사이를 조용히 메운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듯, 우리 사회에도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어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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