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발트빛 하늘과 음유시인의 노래

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by 아마도난

님(Nîmes)에 도착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눈이 시릴 만큼 투명한 코발트빛 하늘과 그 아래 마치 강박증 환자가 닦아놓은 듯 매끄럽고 잘 정비된 도로였다. 남프랑스의 태양은 어찌나 성실한지 지표면의 모든 색채를 하이라이트로 보정하고 있었는데, 이 깔끔한 도시의 첫인상은 마치 2천 년 된 골동품을 최신형 유리 장식장에 넣어둔 것 같은 묘한 세련미를 풍겼다.



도시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자, 거대한 아레나(Arènes de Nîmes)가 앞을 가로막았다. 압도적인 규모의 외벽을 보며 나는 로마인들의 지독한 ‘스케일 부심’을 떠올렸다. 당시 검투사들은 이 거대한 돌덩이들 사이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겠지만, 오늘날의 님 시민들은 이곳에서 팝 가수의 공연을 보며 맥주를 마신다. 2천 년 전 관중이 질러댔을 거친 함성 대신, 이제는 블루투스 스피커의 중저음이 아치를 타고 흐르는 광경이라니.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상아색 돌벽은 마치 "너희가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나는 다 봐왔다"며 득도한 노승처럼 인자하게 서 있었다.

아레나. 테니스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레나의 묵직함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뜬금없이 고결한 자태를 뽐내는 메종 카레(Maison Carrée)가 나타난다. ‘정사각형의 집’이라는, 이 우아한 신전에 붙이기엔 너무나도 성의 없는 이름에 실소했지만 코린트식 기둥들의 비례미를 보는 순간,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종 카레


12세기경, 남프랑스의 옥시타니아(Occitania) 문화가 꽃피던 시절, 이곳은 트루바두르(Troubadour)라 불리는 음유시인들의 무대였다 그들은 리라를 뜯으며 신전에서, 아레나에서 사랑을 노래했다. "오, 나의 여인이여, 당신의 눈동자는 이 신전의 대리석보다 매끄럽군요!" 같은, 지금 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들 법한 미사여구를 쏟아냈을 그들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트루바두르 공연모습 (AI가 그린 그림)


님은 로마의 엄격한 공학과 중세의 오글거리는 낭만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있는 기묘한 칵테일 같은 도시다. 도시 북쪽의 퐁텐 정원을 지나 마뉴 탑(Tour Magne)에 오르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로마 성벽의 일부였던 이 탑은 이제 세월에 깎여 투박해졌지만, 그 위용은 여전히 "내가 이 구역의 대장이다"라고 외치는 듯했다. 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님의 붉은 기와지붕은 파도처럼 일렁이는 절경을 이루었다. 이 높은 곳에서 시인들은 론강 너머를 보며 시상을 떠올렸겠지만, 나는 그저 '내려갈 땐 무릎이 무사할까'를 걱정하는 현실적인 중년의 비애를 느꼈다.

마뉴 탑(Tour Magne)


님에서 느낀 이 정갈함과 유적들의 조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과거의 유산을 모셔두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옆으로 트램이 지나가게 하고 노천카페를 열어 시끌벅적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역사를 대하는 아주 쿨한 방식이었다. 낡음은 남루함이 아니라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되었고, 새로움은 경박함이 아니라 과거를 보좌하는 충실한 집사 같았다.

퐁텐정원
마뉴탑에서 본 님 시가지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코발트색은 더욱 깊어져 보랏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2천 년 전 로마인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 중세의 시인들이 노래를 덧입히고, 현대의 청소차들이 도로를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이 도시. 님은 나에게 '영원함'이란 박물관의 박제가 아니라, 매일 아침 유리창을 닦듯 정성스럽게 오늘을 가꾸는 사람들의 활기 속에 있다는 것을 유쾌하게 일깨워 주었다. 트루바두르의 사랑 노래 한 소절을 흥얼거리며 가벼워진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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