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카스가 종을 울렸다

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by 아마도난

프랑스 남부의 지평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중세의 신기루가 눈앞에 나타난다. 카르카손(Carcassonne) 요새다. 오드강 위로 겹겹이 둘러쳐진 이중 성벽과 하늘을 찌를 듯한 52개의 고깔 모양 탑들은, 노을이 내릴 때면 마치 황금 갑옷을 입은 거대한 기사가 대지를 굽어보는 듯한 장엄한 위용을 자랑한다. 그 압도적인 풍광 앞에 서면 누구나 '이 성은 결코 무너진 적이 없을 것'이라는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보드게임 카르카손


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오늘날 전 세계인의 책상 위에서 보드게임 '카르카손'으로 다시 태어났다. 타일을 하나씩 이어 붙이며 성을 쌓고 길을 내는 이 게임은, 중세의 영토 확장을 절묘하게 재현해 냈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 점수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타일을 맞추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견고한 돌벽 안에 박제된 전설적인 여인 '카르카스(Carcas) 왕비'의 이야기다.

카르카손 성 입구의 카르카스왕비 석상


8세기경, 프랑스의 샤를마뉴 대제의 대군은 이 성을 5년이나 포위했다. 성 안의 식량은 바닥났고 병사들은 굶주림에 지쳐 항복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때 카르카스 왕비는 기상천외한 명령을 내렸다. 성안에 남은 돼지 한 마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보리 한 자루를 몽땅 먹이고 돼지를 성벽 밖으로 내던지게 한 것이다. 추락한 돼지의 배가 터지며 귀한 보리가 쏟아져 나오자, 적군은 경악했다.


"세상에, 돼지에게 보리를 먹여 내던질 정도로 식량이 넘쳐나다니! 굶주림에 지쳐 항복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전의를 상실한 적군이 포위를 풀고 퇴각하자, 왕비는 승리의 종을 힘차게 울렸다. 멀어지던 샤를마뉴 대제의 병사들이 그 소리를 듣고 "카르카스가 종을 울린다(Carcas sonne)!"라고 외쳤고, 이것이 오늘날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왕비의 기지 뒤에는 가슴 시린 사랑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전쟁 중 전사한 남편을 대신해 홀로 성을 지켰던 그녀는, 낮에는 강인한 군주였으나 밤이면 가장 높은 나르보네즈 탑에 올라 등불을 밝혔다. 혹시나 전장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을 남편의 영혼을 위해서, 혹은 다시 돌아올 평화를 기다리며.



그녀가 돼지를 던져 전쟁을 끝낸 것은 단순히 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 사랑하는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간절한 순애보였을지도 모른다. 견고한 성벽 틈새에 피어난 들꽃들이 유독 붉은 것은, 연인을 기다리며 돌벽을 어루만졌던 왕비의 눈물겨운 정성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보드게임 타일을 놓으며 성을 완공하고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카르카손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은 타일의 배치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포위망 속에서도 '마지막 돼지를 던지는 여유'와 '밤새 등불을 밝히는 사랑'이 있다면, 우리 마음의 요새는 결코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을 지는 카르카손의 성벽은 오늘도 우리에게 속삭인다. 세상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칼날이 아니라, 벼랑 끝에서도 터져 나오는 호탕한 웃음과 멈추지 않는 사랑이라고.



카술레

저녁식사로 카술레를 먹었다. 카술레는 이 지방 특산인 하얀 강낭콩과 오리 다리 구이(콩피), 소시지, 그리고 각종 육류를 투박한 질그릇인 '카솔(Cassole)'에 담아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여낸 향토요리다. ​여러 가지 식재료를 몽땅 쏟아부어 이토록 풍요로운 맛을 만들어낸 카술레의 미학은, 어쩌면 마지막 남은 보리 한 자루를 돼지에게 먹여 성을 지켜낸 왕비의 배짱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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