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길, 사랑의 흔적

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by 아마도난

프로방스의 봄은 침묵 속에 오지 않는다. 그것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찾아온다. 아를(Arles)의 좁은 골목을 지나 님(Nîmes)의 광장으로, 다시 아비뇽(Avignon)의 성벽을 넘어 카르카손(Carcassonne)의 요새에 이르기까지, 북쪽에서 내려오는 차갑고 강인한 바람 ‘미스트랄’이 온 대지를 휘저어 놓는다. 이 바람은 때로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만큼 사납지만, 역설적이게도 하늘을 더없이 맑게 씻어내고 포도 넝쿨을 단단하게 단련시키기도 한다.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드넓은 포도밭은 이 거친 바람을 견뎌낸 훈장이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과 맞서 싸운 포도나무는 그 고통을 달콤한 과육으로 승화시킨다. 이곳의 포도주가 유독 깊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단순히 토양의 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이 땅의 인내와, 그 위에서 명멸해 간 수많은 영혼의 희로애락이 응축된 결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잔의 붉은 포도주에는 로마 군단의 진군 소리와 연인들의 가느다란 숨결이 모두 녹아 있는 것이다.


님(Nîmes)의 퐁텐 공원을 거닐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잠시 멈춘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물의 신에게 봉헌된 이 고요한 정원 한구석, 반쯤 허물어진 다이안 신전은 여전히 우아한 기품을 간직하고 있다. 수천 년 전 이곳에서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누군가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가슴을 치며 이 차가운 대리석을 쓰다듬었을지도 모른다.

다이안 신전


로마인들이 남긴 거대한 원형 경기장과 신전들은 단순히 권력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 땅에 남기고 간 가장 거대하고도 처절한 삶의 흔적이다. 돌들은 말이 없으나, 그 결마다 새겨진 손때는 수많은 생애의 기록이다. 아를의 노천카페에 앉아 있으면, 알퐁스 도데가 노래했던 '아를의 여인'이 금방이라도 화려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나타날 것만 같다. 비극적인 사랑 끝에 스스로를 던졌던 젊은이의 절망과,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말없이 흐르던 론 강의 물결. 비너스 조각상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향한 동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기도, 가장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기도 한다.

아를의 원형경기장
아를의 비너스
아를의 여인, 고흐


사랑의 애절함을 논할 때 아비뇽과 페트라르카를 빼놓을 수 없다. 교황의 성벽이 위엄 있게 서 있는 이 도시에서, 시인 페트라르카는 운명의 여인 라우라를 만났다. 성당의 미사 시간, 찰나의 눈 맞춤으로 시작된 그의 사랑은 평생을 따라다닌 거대한 그림자였다.


"그녀의 금발은 바람에 흩날리고, 그 눈빛은 태양보다 찬란했노라."

페트라르카에게 라우라는 가질 수 없는 별이었고,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이었다. 그는 평생 그녀를 향한 소네트를 쓰며 자신의 영혼을 깎아 문장을 만들었다. 님(Nîmes)의 포도밭을 적시는 미스트랄이 그의 펜 끝을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때로 결실을 맺지 못할 때 비로소 영원이 된다. 아비뇽의 끊어진 다리처럼 완성되지 못한 사랑은 그 자체로 애절한 아름다움이다.

소네트


카르카손의 요새는 마치 거대한 시간의 함선 같다.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철옹성 안에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사랑하고, 죽어갔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연인들은 성벽 뒤에서 입을 맞추었을 것이고, 어머니들은 전쟁터로 떠난 아들의 무사 귀환을 빌며 포도주를 빚었을 것이다.


이 지역의 포도주 맛이 인상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시간의 맛'이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은 거친 봄바람을 맞으며 포도를 가꾸고 역사를 써 내려왔다. 한 모금의 포도주를 머금는 것은, 퐁텐 공원의 다이안 신전을 만지는 것이며, 페트라르카의 시구(詩句)를 읽는 것이며, 아를의 여인이 남긴 향기를 맡는 것과 같다.


아를도, 님도, 아비뇽도 그리고 카르카손까지 이곳은 단순히 관광의 명소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열망이 켜켜이 쌓인 퇴적층이다. 거친 바람 속에 흩뿌려진 사랑의 이야기들이 포도나무뿌리를 타고 올라와 붉은 액체로 다시 태어났다. 비록 사람은 떠났어도 바람은 여전히 불고 돌에 새겨진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프로방스의 거친 봄바람을 창밖에 두고 고대의 숨결이 담긴 포도주 한 잔을 기울여 본다. 술잔 속에 일렁이는 것은 아마도 수백 년 전 어느 여인이 흘린 눈물 한 방울, 혹은 어느 시인이 가슴에 품었던 뜨거운 불꽃일지도 모른다. 이 아름답고도 애절한 대지 위에서 다시 사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삶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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