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카르카손을 떠나는 아침은, 분명 낭만으로 시작되었다. 성벽 위를 스치던 바람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고, 돌길을 밟을 때마다 들리던 과거의 잔향이 여행자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떠나야만 했다. 목적지는 몽펠리에. 지도 위에서는 손쉽게 이어지는 점과 선이었지만, 현실은 늘 지도보다 훨씬 복잡한 법이다.
카르카손에서 기차는 40분이나 늦게 출발했다. 환승역인 나르본에서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20분. 나르본에 도착했을 때 몽펠리에행 열차는 이미 우아하게 떠나버린 뒤였다. 플랫폼에는 바람만이 남아 슬그머니 심술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 열차 아무거나 타세요.”
사무실의 역무원은 너무도 태연하게 말했다. 여행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약간의 동정을 기대하기 마련 아닐까 ‘아, 큰일 났네요!’라든지, ‘도와드릴게요!’ 같은 인간적인 반응 말이다. 역무원에게 그런 감정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였나 보다. 시스템은 냉정했고, 직원은 더 냉정했다.
역무원의 ‘아무거나’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가장 먼저 도착한 열차에 올랐다. 그것은 IC 열차였다. 그 열차가 나를 구원해 줄 기사인 줄 알았는데 현실의 기사는 검표원이었다.
“이 표로는 안 됩니다.”
그는 단호했다. 사무실의 역무원에게서 들은 말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열차에서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커다란 캐리어가 내 인생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이쯤 되면 여행이 아니라 체력 단련이다.
“아, lio열차는 lio열차만 탑승할 수 있어요.”
직원은 이번에도 태연했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이제야 떠올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은 오히려 나만 손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계단을 올랐다. 내려갔다. 또 올랐다. 나르본 역의 계단 구조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건축가가 있었다면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아주 효율적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드셨군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카르카스 왕비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기 전에 카술레 한 숟가락 더 뜨고 가시오, 이방인 양반.”
남프랑스의 대표 음식인 카술레. 그 진득하고 깊은 맛을 너무 성급하게 남겨두고 떠나는 내가 왕비는 야속했나? 여행자의 가장 큰 죄는 ‘맛있는 것을 덜 먹고 떠나는 것’이니까.
마침내 lio 열차가 도착했다. 창밖으로 풍경이 흘러갔다. 포도밭이 이어지고,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의 소동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깨와 팔은 여전히 현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이런 돌발상황이 있어야 여행이 완성되는 것 아닐까. 완벽하게 계획된 일정은 편안할지 몰라도, 새벽안개처럼 쉽게 사라질지 모르니까. 반면, 나르본 역의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내렸으니 쉽게 잊히지 않을게다.
아마도 여행이란 계획과 어긋나는 순간들, 예상치 못한 불편함,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웃음.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그날의 지연과 실수와 계단 오르내리기는 모두 필요했던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카르카스 왕비가 연출한, 조금은 짓궂은 희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