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몽펠리에는 첫인상부터가 남달랐다. 남부 프랑스의 여느 도시들이 세월의 이끼를 그대로 두른 채 정체된 공기를 뿜어낸다면, 이곳은 마치 막 기지개를 켠 젊은 청년의 얼굴처럼 생기가 넘쳤다. 활짝 열린 대로 위로 트램이 매끄럽게 흐르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리듬감이 실려 있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를 품고 있는 도시답게, 공기 중에는 지적인 호기심과 청춘의 활발함이 미세한 입자가 되어 떠다니는 듯했다.
도시는 넓고 쾌적했다. 구획이 시원하게 나뉜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현대적인 세련미를 뽐내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외관은 이 도시가 지닌 자부심을 대변하는 듯했고, 그 사이를 스치는 바람조차 정제된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몽펠리에가 단순히 '잘 정비된 현대 도시'에 머물렀다면 그토록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도시의 진정한 마력은 현대적인 감각 사이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시간의 흔적들에 있었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거대한 수도교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백 년 전, 물을 실어 나르던 그 돌기둥들은 이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도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 장엄한 아치 아래 서면 인간의 생애보다 훨씬 긴 시간을 버텨온 돌들의 호흡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 옆을 지키는 개선문은 또 어떠한가. 태양왕 루이 14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그 육중한 문을 보며, 문득 이 도시가 '남부의 파리'를 꿈꿨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파리를 닮고 싶어 했던 열망이 빚어낸 정돈된 거리와 우아한 건축물들은 이제 몽펠리에만의 독특한 품격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대로에서 한 발짝 안쪽으로 발을 들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아기자기하게 얽힌 골목길들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낯익은 글자, '한국어 코너'라는 기발한 이름의 한국식당 간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고국의 흔적은 마치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길모퉁이에서 다시 만난 듯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반가움과 애틋함이 뒤섞인 묘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혹시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낯선 타국에서 한국 여인을 만나게 된다면 지금 이 마음보다 더 반가울까?' 하는 실없는 가정도 해보았다. 낯선 공기 속에서 피어오른 익숙한 향기는 타향의 고독을 달래주는 동시에, 내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젊은 날의 열정을 다시금 일깨우는 듯했다.
그 찰나의 조우 때문이었을까. 이 도시라면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소한 갈망이 피어올랐다. 나는 아내의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한 손마디가 오늘따라 유난히 애틋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젊은 연인들처럼 활기 넘치는 코미디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넓게 펼쳐진 광장의 개방감과 아내의 온기가 어우러지자, 가슴 한구석에서 잊고 지냈던 설렘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노천카페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몽펠리에의 풍미가 담긴 커피를 주문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커피의 향긋한 향과 테라스를 스치는 다정한 바람, 그리고 눈앞에 앉아 미소 짓는 사람. "이게 정말 행복이지" 하는 충만한 만족감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잔잔하게 번져 나갔다. 인생의 화려한 성취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낯선 도시의 오후를 나누는 이 소박한 평온이야말로 진정한 생의 찬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 너머로, 몽펠리에 인근 마겔론 섬에 전해 내려오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겹쳐졌다. 나폴리 왕의 아들 피에르와 공주 마겔론의 전설. 온갖 시련과 이별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끝내 다시 만났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이 도시의 오래된 돌담마다 스며들어 있는 듯했다. 수백 년 전의 연인들이 지켰던 그 간절한 마음이, 오늘날 광장을 가득 채운 젊은 연인들의 웃음소리와 아내를 쥔 나의 손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의 파동은 파브르 미술관에 들어섰을 때 절정에 달했다. 고전적인 외관 속에 숨겨진 파격적인 그림들은 이 도시의 반전 매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사실 심드렁하게 들어선 미술관이었다. 명성을 몰랐으니까. 첫 작품 앞에 섰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어! 이곳이 이런 곳이었어?"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받았던 충격을 이곳에서도 받았다. 몽펠리에가 가진 자유로운 영혼과 세련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듯했다.
수도교 너머로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도시는 더욱 짙은 감성으로 물들었다. 세련됨 속에 감춰진 따뜻한 인간미, 거대함 속에 숨어있는 소박한 골목의 정취, 그리고 마겔론의 전설과 미술관의 파격적인 예술혼까지.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이 도시에서 나는 다시금 삶을 뜨겁게 껴안고 싶어졌다.
몽펠리에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여행의 한 대목이 아니라, 메말라 있던 감성의 샘에 다시 물이 차오르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면, 그때는 이 도시가 일깨워준 그 사랑의 마음을 온전히 품은 채 더 깊숙한 골목까지 아내와 나란히 걸어 들어가 보고 싶다. 오래된 유적의 그림자 아래서, 우리는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의 사랑을 다시금 고백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