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마르세유 생 샤를역(Saint-Charles)에 발을 내디뎠을 때 마주한 역 주변의 복잡함과 어수선함은 낭만적인 지중해의 꿈을 잠시 보류하게 만들었다. 그 실망감은 높다란 계단을 내려가 항구로 향하는 순간, 마법처럼 증발해 버렸지만....
비릿한 바다 내음이 섞인 바람을 따라 도착한 구 항구(Vieux Port)는 그야말로 반전의 무대였다. 지중해 특유의 파란 하늘은 마치 누군가 코발트블루 물감을 쏟아부은 듯 선명했고, 그 아래 펼쳐진 바다는 하늘과 닮은 듯하면서도 윤슬을 머금어 또 다른 깊이를 뽐내고 있었다. 역에서의 찌푸린 미간이 활짝 펴지며 입가에 경탄이 새어 나왔습니다. "아, 역시 마르세유구나!"
수많은 요트가 정박한 부둣가에 서자 이 지역에 전해온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바다는 데려가기도, 돌려보내기도 한다." 이 말은 마르세유의 2,600년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정직한 고백이다. 바다는 이방인 프로티스를 데려와 마르세유를 건설하게 했다. 또한 풍랑으로 소중한 이들을 데려가 가족들의 눈물을 뿌리게도 했다.
항구를 감싸 안은 요새들은 이 도시의 굴곡진 연륜을 묵직하게 대변한다. 특히 생장 요새(Fort Saint-Jean)는 매우 흥미로운 건축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보통의 요새가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지어졌다면, 이곳은 외부 침입뿐만 아니라 마르세유 시민들의 반란을 감시하기 위해 포구가 도심 쪽을 향해 배치되기도 했다. 권력이 자유를 '데려가려' 했던 서슬 퍼런 역사의 흔적이다.
높은 언덕 위에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이 금빛 성모상을 머리에 이고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바다가 데려간 아들과 남편들이 무사히 돌아오길(돌려보내 지길) 빌던 어머니들의 간절한 기도가 모인 곳이다. 반면 바닷가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라 마조르 대성당은 거대한 줄무늬 옷을 입고 항구로 들어오는 모든 이를 환영하며, 바다가 돌려보낸 삶의 활기를 축복하는 듯했다.
과거의 유산 옆으로는 마르세유의 역동적인 숨결이 느껴지는 현대적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룬다. MuCEM(유럽-지중해 문명 박물관)은 정교한 레이스 같은 외벽을 통해 빛이 그림자를 놀이하듯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 곁의 코스케 케이브(Cosquer)는 수만 년 전 해수면 상승으로 바다가 삼켜버렸던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를, 현대의 기술이 복원하여 우리에게 다시 '돌려보낸' 현장이다. 이들은 마르세유가 박제된 과거에 머무는 도시가 아니라, 내일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젊은 도시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라는 빠니에는 걷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곳이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마다 알록달록한 벽화와 화분들이 놓여 있고, 그 사이를 비추는 햇살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조명 같기도 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풍경들은 더욱 정겹다. 길모퉁이에서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애정표현을 하는 연인들의 모습은, 이곳이 사랑의 열정만큼은 지중해의 태양보다 뜨거운 곳임을 실감케 한다. 그 옆으로 들리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지중해의 봄날을 더욱 따뜻하게 색칠해 주었다. 무뚝뚝해 보이던 사람들도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표정 앞에서는 무장해제되어버리는, 그 무해한 평화가 여행자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고 있었다.
기차역의 첫인상에 속았다면 이 위대한 도시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는 나에게서 여행 시작의 피로를 '데려가고', 대신 가슴 벅찬 감동을 '돌려보내' 주었다. 마르세유는 마치 겹겹이 쌓인 페이스트리처럼, 한 꺼풀씩 벗겨낼 때마다 새로운 맛을 보여주는 도시다. 처음엔 낯설고 투박할지 몰라도, 그 속살은 그 어떤 도시보다 달콤하고 찬란했다. 지중해의 봄볕 아래서 어느덧 이 도시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바다가 돌려보낸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나의 여행은 비로소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