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의 춤

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by 아마도난

남프랑스의 햇살은 공평하다. 골목 구석구석을 비추는 황금빛줄기는 오래된 저택의 사암 벽면에 머물며 도시 전체를 따스한 호박색으로 물들인다. '물의 도시'이자 '예술의 도시'라 불리는 엑상프로방스에서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은 수백 개의 분수가 뿜어내는 정겨운 물소리다. 이 물소리는 도시의 심장박동처럼 고요하면서도 힘차게 흐르며 여행자의 발길을 인도한다.


엑상프로방스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두 이름이 있다. 바로 근대 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과 자연주의 문학의 거장 에밀 졸라다. 두 사람은 이곳 부르봉 중학교에서 만나 소년 시절의 꿈을 공유했다. 가난했던 졸라와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이었던 세잔은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며 프로방스의 산과 들을 누볐다.

'에밀 졸라에게 책 읽어주는 폴 알렉시', 1869~70, 폴 세잔


도시의 중심축인 미라보 거리(Cours Mirabeau)를 걷다 보면 그들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세잔은 생애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며 빛에 따라 변하는 사물의 본질을 탐구했고, 졸라는 그의 문학적 자양분을 이 도시의 토양에서 길어 올렸다. 비록 훗날 졸라의 소설 내용을 오해해 두 사람의 교류가 끊어지는 비극을 맞이했지만, 엑상프로방스의 길 위에는 여전히 '세잔의 구두'를 형상화한 동판이 박혀 있어 그들의 흔적을 잇고 있다.


미라보 거리 한쪽 끝에 자리한 카페 레 되 가르송은 1792년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이 도시의 상징이다. 화려한 금박 장식과 세월의 때가 탄 거울이 가득한 이곳은 세잔과 졸라뿐만 아니라 헤밍웨이, 피카소, 알베르 카뮈 등 수많은 지성인이 머물던 아지트였다고 한다.


카페 레 되 가르송. 수리중이어서 인터넷에서 가쳐왔다


이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앞에 두고 19세기의 어느 오후로 시간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수리 중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카페를 넘어, 도시의 기억을 저장하는 거대한 도서관과 같다는데.... 여기서 커피를 마시는 상상을 하며 예술가들이 고민했던 삶의 본질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엑상프로방스에는 특유의 낭만이 흐른다. 그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 때문만이 아니라,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연인과 예술가들이 남긴 '사랑'에 대한 헌사 때문이다. 도시 곳곳의 좁은 골목마다 피어 있는 라벤더 향기는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의 설렘을, 누군가에게는 오랜 동반자와의 평온한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세잔이 그토록 집착하며 그렸던 생트 빅투아르 산은 그가 자연에게 보낸 가장 열렬한 구애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수천 번의 붓질로 산의 영혼을 담아내려 했던 그의 고독한 사랑은, 오늘날 이 도시를 찾는 연인들에게 변치 않는 가치를 가르쳐준다.

'생트빅투아르 산', 폴 세잔


엑상프로방스는 서둘러 지나치는 여행자에게는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을 구경하고, 시장에서 파는 달콤한 '칼리송(Calisson)'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비로소 도시의 속삭임이 들린다.


이곳에서의 여행은 마침표가 아니라 긴 쉼표다. 미라보 거리의 활기, 그리고 수많은 이름 모를 분수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우리에게 말한다. 삶은 우연한 만남의 연속이지만, 그 만남을 운명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마음속에 품은 사랑과 열정이라고. 엑상프로방스의 붉은 지붕 위로 노을이 내려앉을 때쯤, 여행자의 가슴속에는 지워지지 않을 따스한 빛이 한 편의 수필처럼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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