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 에즈 빌리지는 시간이 천천히 굳어 만들어낸 조각품 같았다. 돌로 쌓은 집들은 햇빛을 머금고 있었고,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은 발걸음을 늦추게 했다. 길 끝마다 바다가 열렸고, 그 푸른 풍경 위에 선인장들이 조용히 서 있었다. 선인장 정원(Jardin Exotique)은 마치 시간이 식물의 형태로 자라난 듯했다. 날카로운 가시를 지닌 선인장조차 이곳에서는 온순한 표정이었다.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는 동안 욕망이라는 단어를 잠시 잊었다. 바람은 소박했고, 사람들은 조용히 걷고 있었다. 무엇을 가지려 하기보다, 이미 있는 것들을 오래 바라보는 태도. 어쩌면 이 마을은 ‘덜어냄’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이었는지 모른다.
에즈에서 멀지 않은 모나코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항구에는 값비싼 요트들이 빽빽하게 정박해 있었고, 거리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차들이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욕망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몬테카를로 카지노가 있었다.
카지노의 화려한 건물 앞에 서자 묘한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은은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보이지 않는 기대가 공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정교하게 설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문득 “하늘이 내린 부자”라는 아내의 사주가 떠올랐다. 가볍게 넘겨왔던 그 말이 이곳에서는 묘하게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혹시 이곳에서 그 말이 맞아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충동과 함께 한 발짝만 들어가면 전혀 다른 하루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잠시 카지노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상했다. 칩을 쥔 손, 점점 커지는 판돈, 잠시 숨을 죽이다 한순간에 바뀌는 인생. 흥분이 고조되는 순간, 에즈의 골목이 떠올랐다. 천천히 걷던 시간,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충분했던 감각, 바람과 햇살만으로도 충만했던 순간들. 결국 카지노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
항구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반짝이는 요트들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바다는 에즈에서 보았던 그것과 같은 색이었다. 전혀 다른 삶의 방식 위에 놓여 있지만,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같은 빛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오늘 마주한 것은 두 도시가 아니라, 두 개의 유혹이었다는 것을. 하나는 덜어내며 완성되는 삶이었고, 다른 하나는 채워가며 확장되는 삶이었다.
아내의 ‘부자 사주’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돈이 아니라, 욕망 앞에서 물러설 수 있는 여유를 많이 가진 부자라는 뜻이었을 테니. 오늘 나는 아무것도 얻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가진 채로 모나코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