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의 햇살 속에 잠든 파가니니

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by 아마도난

니스의 중심가를 걷다 보면 낯익은 이름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뤼 파가니니(Rue Paganini)'. 거리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내건 호텔까지,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이 휴양 도시는 19세기의 전설적인 악마적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를 도처에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페이지를 들춰보면 파가니니가 이곳의 화려한 무대 위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은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니스는 이 이방인의 이름을 도시의 혈관 속에 각인해 둔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구시가지의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었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건물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지도는 모호했고,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건물들은 저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포기하려던 찰나, 인근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한 젊은 여인의 도움으로 마침내 그 흔적 앞에 설 수 있었다. '성 파울로 집'이라 불리던 그 고요한 건물, 바로 그곳이 전 유럽을 광기 어린 선율로 흔들어 놓았던 거장이 마침내 활을 내려놓은 종착지였다.

이 건물 2층에서 파가니니가 생을 마감했다.
파가니니가 죽은 건물 2층 외벽에 붙어있는 기념판 "니콜로 파가니니, 1840년 5월 27일 이 집에서 사망하다" 라는 문구와 그가 바이올린의 귀재였음을 기리는 내용이 쓰여 있다


파가니니에게 니스는 화려한 갈채의 무대가 아닌, 가장 처절하고도 고요한 '안식의 방'이었다. 평생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괴소문에 시달리며 유럽 전역을 방랑하던 그에게, 만년의 육신은 고장 난 악기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후두암으로 목소리를 잃고, 결핵과 수은 중독으로 쇠약해진 거장은 1839년의 끝자락, 따뜻한 남프랑스의 햇살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이곳 니스에 당도했다.

그에게 니스는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사투'였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초인적인 기교를 선보이던 '악마의 아들'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가 필요한 한 명의 노쇠한 인간으로서 그는 니스의 바다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가 묵었던 방의 창 너머로 비쳐 들었을 지중해의 푸른빛은, 평생을 따라다녔던 검은 환영들을 잠시나마 걷어내주었을까.


역설적이게도 니스는 그에게 가장 가혹한 침묵을 강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목소리를 잃은 그는 종이에 글을 써서 아들과 소통해야 했고, 죽음 직전에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종부성사를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신성모독적이라는 이유로 그의 시신은 수년 동안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한 채 방황해야 했다. 니스에서의 임종은 찬란한 마침표가 아니라, 긴 침묵과 유랑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니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거리에 새기고 정성껏 기리는 이유는, 그가 이곳에서 보여준 '인간적 고뇌'에 대한 경의일 것이다. 무대 위의 광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한 예술가의 고독과 병마, 그리고 삶에 대한 마지막 애착이 이 도시의 공기 속에 여전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찾는데 도움을 준 여인의 미소와 거장의 임종 건물이 겹쳐 보이던 그 오후, 비로소 깨달았다. 파가니니에게 니스는 도피처도, 공연장도 아니었다. 그것은 치열했던 예술적 생애를 뒤로 하고, 한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소멸해 가기 위해 선택한 '운명적 제단'이었다.


이제 니스 거리에 울려 퍼지는 바람 소리는 더 이상 파가니니의 기괴한 바이올린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기교와 명성을 내려놓고 비로소 평온을 얻은 자의 깊은 숨소리이자, 길을 잃은 여행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현지인의 따스한 마음이 빚어낸 현대의 협주곡이다. 그가 잠든 건물 앞에서 느꼈던 그 엄숙한 고요는, 죽음조차 예술로 승화시킨 한 거장이 니스라는 도시에게 남긴 가장 고귀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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