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쓴 담백한 일기

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by 아마도난

남프랑스의 눈부신 햇살 아래, 몽펠리에에서 모나코까지 이어진 여정은 단순히 지도를 따라 걷는 물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결을 만지는 일이었고, 길 위에서 마주친 수많은 우연이 어떻게 우리 삶의 필연적인 운명으로 치환되는지를 목격하는 과정이었다.


몽펠리에의 파브르 미술관에서 받은 감동이 쉽게 잊히지 않을 듯하다. 르네상스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예술의 숲을 거닐며, 캔버스 위에 고착된 아름다움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 작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쏟아내는 감탄이다. 예술은 박물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 밖 코미디 광장의 분수대 앞에 앉아 흐르는 시간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마르세유에서는 귀여운 꼬마 기차가 우리를 반겼다. 장난감 같은 기차에 몸을 싣고 구불구불한 언덕을 올라갈 때면,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기차 창밖으로 스치는 투박한 항구의 풍경과 비릿한 바다 내음은 삶의 현장이 주는 숭고함을 전해주었고,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에 올라 내려다본 지중해의 깊은 푸른빛은 세상의 어떤 물감으로도 온전히 재현할 수 없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엑상 프로방스로 발길을 옮기자 풍경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폴 세잔이 사랑했던 이 도시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 같았다. 미라보 거리를 가득 채운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을 맞으며 걷는 길은 마치 인상주의 화가의 붓 터치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그뿐인가? '프로방스에서 물이 나는 곳'이라는 도시 이름에 걸맞게 곳곳에서 솟구치는 분수의 물줄기는 여행자의 메마른 감성을 적셔주기에 충분했다.



여정의 정점은 니스와 그 주변의 마을들이었다. 니스의 ‘영국인의 산책로’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자갈 해변과 쪽빛 바다는 마음속 상념들을 파도 소리에 씻어 보냈다. 특히 이곳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는,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곁에 있는 소중한 존재와 보조를 맞추며 천천히 걷는 일임을 일깨워주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에즈 마을은 마치 구름 위의 성처럼 신비로웠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올라 정상의 정원에서 내려다본 지중해는 아찔할 만큼 아름다웠고, 그 풍경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잠시 길을 잃었다. 이어 방문한 모나코의 화려함은 인간이 빚어낸 미학의 극치를 보여주었지만, 그 화려함 뒤에 숨겨진 항구의 고요함이야말로 진정한 낭만의 이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람과 보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쌓아온 서로에 대한 존중은 낯선 풍광 속에서 더욱 단단한 빛을 발했다. 기차 연착으로 무거운 짐을 옮기며 땀을 흘렸던 기억조차, 이제는 "그때 참 대단했지"라며 서로를 보며 껄껄 웃을 수 있는 유쾌한 훈장이 되었으니까.


여행은 결국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남프랑스의 눈부신 햇살과 니스의 파도 소리가 여전히 머물고 있다. 삶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우연'이 결국 우리를 완성하는 '운명'이 된다는 사실을, 이 아름다운 도시들은 담백한 문장으로 제 마음속에 새겨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한 여행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떤 고마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벌써 흥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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