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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Jul 28. 2019

본능


딱히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진 않았지만 저녁 무렵이 되자 몸이 천근만근 되는 것처럼 무거워졌다. 이러다 지쳐 쓰러지겠다 싶어 ‘아, 옛날이여!’를 외치며 소파에 누웠다. 등이 소파를 만나더니 연체동물이 되어버렸다. S자로 누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W자로 바뀐 느낌이 들었다가 다시 S자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하여튼 S인지 W인지 알 수 없는 변형이 끊임없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깊은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화음(和音)처럼 새어 나왔다. 소파에 누운 지 1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사망 직전까지 간 모양이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밥 먹어!’라는 말이 되어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어서 누군가가 귀에 대고 ‘밥 먹어!’하는 소리를 반복하며 처음에는 다리를 ‘톡’ 치고 그다음에는 어깨를 ‘툭’ 치더니 나중에는 가슴께를 ‘퍽’하고 내리쳤다. 가만히 있다가는 복부를 가격 당할 것 같아 벌떡 일어났다. ‘잠 좀 자게 놔두지!’하고 구시렁거리며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었다. 1분쯤 지난 줄 알았는데 40여분을 졸도(?)해 있었던 것이다.





                           

항상 그렇듯 싸움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됐다. 눈을 비비며 주방에 가보니 식탁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간장, 고추장 및 된장은 물론 냉장고 안에 있던 용기란 용기가 모두 식탁 위에서 제멋대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그 광경이 눈언저리에 남아있던 잠을 천리 밖으로 쫓아버렸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분노를  누르며 식탁을 정리하고 저녁상을 차렸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밥이 조금 모자란 듯하여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배가 고플지도 모르겠네.’라고 했다. ‘아, 이놈의 주둥이!’하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자식이 배고플 거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급히 저녁밥을 지어야겠다며 빈 냄비를 들고 쌀을 푸러 갔다. 괜찮다고, 배가 고프면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어미의 본능은 그깟 말 따위는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겨우 밥 짓는 수고(?)를 말렸더니 이번에는 국수를 삶겠다고 한다. 서랍에 있던 물건들이 삽시간에 주방 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에 억눌려 있던 분노가 활화산이 되어 거친 말로 쏟아져 나왔다. 가는 말이 거친데 오는 말이 고울까? 어미는 자식의 배고픔을 챙기려다 저지당해 화가 났고, 자식은 어미가 어질러 놓은 부엌 때문에 화가 났다. 독한 말을 퍼부으며 어머니는 문을 쾅 닫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났다. 거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어머니가 슬며시 옆으로 왔다. 모르는 척하자 어머니는 눈치만 살필 뿐 말을 붙여오지 못했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어 가볍게 말을 걸자 반갑게 받았다. 싸움은 거친 말로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겼지만 화해는 말없이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너와 내가 이러면 집안이 잘 될 수가 없어. 집안이 잘 되려면 너와 내가 구순하게 지내야 하니까 이제부터 서로 양보하며 지내자.’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집안을 지켜야 한다는 ‘사회화된 본능’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게 있어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곧이어 눈물이 핑 돌며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오 불쌍한 우리 어머니~!’하며  속으로 통곡했다. 머지않아 ‘본능’만 남게 될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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