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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Nov 21. 2019

저절로 멈추는 펜

결재용 도장과의 해후

백수 생활을 끝내고 출근한 첫날. 관리팀장이 다가와 이름을 한자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한자 이름? 순간적으로 ‘요즘에도 명함에 들어가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나?’하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자 이름이 왜 필요하죠?” 그녀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결재용 도장을 주문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결재용 도장이라....


대학을 마치고 설렘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하던 날에도 직속 과장은 결재용 도장을 선물로 주었었다. 성은 빼고 이름만 한자로 새겨 넣은 기다란 도장이다. 과장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을 축하하며 회사에서도 승승장구하길 바란다는 덕담도 곁들여 주었다. 그날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결재서류가 만들어지면 제일 먼저 그 도장이 찍혔다. 도장을 찍는 순서가 뒤로 미루어지고 마침내 도장 대신 서명을 하게 되면서 그 도장은 책상 서랍 속에서 뒹굴게 되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서랍을 정리하다 나를 빼꼼히 바라보던 도장을 발견했다. 그동안 소홀히 대했던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월급쟁이의 시작을 함께 한 동지이기도 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지금도 이 도장은 인감도장과 나란히 보관되어 있다.


관리팀장이 결재용 도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며 한자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그 도장이 생각났다. 4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도장이니 골동품에 비견될 만한 해서 “그럴 필요 없어요. 집에 하나 있으니 그걸 다시 쓰지요.”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회사 생활의 첫 발을 함께했던 도장에게 두 번째 출발도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가 말하는 도장에 대해서는 충분히 상상이 됐는지 “그 도장은 불편하실 텐데요. 요즘은 결재용 양면 도장을 씁니다.”라고 말하며 심드렁하게 돌아섰다. 그녀의 말인즉슨 이름이 새겨진 면은 결재를 할 때 쓰고, 성만 새겨 넣은 면은 확인을 할 때 용이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답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 마음이 가볍게 무시당했다는 느낌과 함께 디지털 시대에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결재방식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장이 도착하자 두툼한 전표와 결재서류들이 기다렸다는 듯 책상 위에 나타났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숫자들을 보며 “저 놈들이 도장밥을 기다렸단 말이지?” 하며 서류들을 뒤적여 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접해보지 않았던 문자들을 다시 보자 비로소 회사에 출근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던 문자와 어울리다 냉정한 문자와 씨름하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마지막으로 도장 찍어본 게 언제야?

낯선 숫자에, 낯선 용어 그리고 낯선 시스템에 버벅거리며 서류 검토를 끝내고 도장을 찍으려는 순간 문득 팔이 멈췄다. 옛 생각이 난 것이다. 결재를 위해 펜으로 서명하다 보면 펜이 저절로 멈춰서는 신공(神功)을 부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억지로 펜을 나아가게 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도장으로 결재를 해도 이런 신공이 나타날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팔이 저절로 멈춰 선 것이다.


회사 생활하는 내내 재무회계업무만 담당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루에 결재해야 할 전표나 서류가 엄청나기 때문에 회계전표는 아랫사람을 믿고 결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표를 대강 살피며 사인하다 보면 어느 순간 펜이 멈추는 경우가 생긴다고 했다. 그럴 때 서류를 자세히 살피면 대부분의 경우 업무실수가 있거나 문제가 발견되곤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의 말을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들었다.


그의 말에 공감하게 된 것은 재무회계 책임자로 근무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몇 년 동안 숫자와 씨름하고 났더니 어느 날 펜이 저절로 멈추는 신공이 나타난 것이다. 그때마다 서류를 살펴보면 어김없이 크고 작은 실수가 발견되곤 했다. 귀신이 붙은 건지 경험이 쌓인 건지….


회사에 다시 출근하면서 처음 며칠은 관리팀장이 마련해준 결재용 양면 도장을 썼다.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실감 나게 만들어준 영물이기도 하고 그동안 지니고 있던 결재용 도장과 많이 달라서 세월이 흘렀음을 일깨워주는 장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자 결재서류에는 도장 대신 서명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부지불식간에 익숙한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혹시 펜이 스스로 멈추는 신공도 되살아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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