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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난 Nov 24. 2019

맹지 (盲地)

처음 쓴 수필

벌초에 관하여 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났다. “짐이다, 맡기자 이다, 뭉치자…… 벌초의 두 얼굴”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벌초가 우리 집안만의 숙제는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매해 장손인 사촌 동생으로부터 올 추석 벌초는 언제 할까요? 하는 전화를 받으면 가슴속 깊은 어딘가에서 성가신 느낌이 불현듯 떠 오르곤 했다. 벌초대행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꼭 모여서 벌초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동생 생각은 어떠신가?”
“9월 두 번째 일요일에 모여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사실 우리 집안의 벌초는 힘든 일이 아니다. 번거로울 뿐이다. 산소들은 이미 납골당으로 바뀌어서 벌초해야 할 수고로움이 크지 않았다. 또한 도시에 나가 살고 있다는 핑계로 벌초할 사람을 따로 사서 풀은 그 사람이 깎고 우리는 깎인 풀을 치우는 게 고작이니 힘들 일도 없다. 그저 벌초를 핑계로 아침 일찍 다 같이 모여 얼굴 한 번 더 보고, 묵은 얘기 꺼내 보고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 12시쯤 고속도로 막히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황망히 길 떠나는 게 우리네 벌초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매년 열댓 명이 모였었는데 점차 줄어들더니 급기야 요즘에는 작은 아버님 한 분 포함해서 네 명만이 참석한 것이다. 일이야 벌초대행하시는 분이 하는 것이고 우리는 뒤치닥 거리나 하면 되기 때문에 참석자가 줄었다고 일이 더 고될 것도 없고 시간이 더 지체되지도 않지만 마음 한 구석이 편치는 않았다. 이런 마음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일이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작은아버지께서 한 말씀하신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나 벼.”
“???..”
“여기 납골당에 부모님을 모신 사람은 다 참석했어. 네 아버지, 경한이 부모님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듣고 보니 그런 모양새가 되었네요.”
아버지는 7형제 중 차남이었다. 일찍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큰아버지 산소를 모셨던 곳에 납골당을 만들었는데 납골당을 만든 후 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시어 지금은 다섯 분을 모셔 놓았다. 남은 5형제는 아직 살아 계신데 공교롭게도 오늘 벌초에 5형 제분들의 자식은 한 명도 오지 않은 것이다.
오래전 명절날에 차례를 마치고 식사하면서 "요즘 가족 납골당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우리 집안도 납골당을 만들면 어떨까요." 하는 제안을 내가 했다가 어르신들로부터 단단히 꾸중을 들었었다. 그 후 몇 년 뒤 뜻밖에도 아버지께서 납골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다시 꺼내셨다. 이때부터 몇 년간 어르신들 간에 논란이 계속되더니 납골당을 만드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결론이 나자 일의 진행이 빨라져 남자들 머릿수 비례로 집안마다 돈을 추렴하여 64기짜리 납골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도 “난 이 곳에 안 들어간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있었다. 또 “난 슬하에 딸밖에 없어 앞으로 이곳에 올 일이 없을 게다.”라고 말씀하신 분도 있다.




사촌들이 각자의 가정을 꾸려 가면서 제 각각의 사정도 늘어나고 있나 보다. 모임도 예전만 못하고, 의견 수렴도 전 같지 않고 더 나아가서 얼굴 보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선산에 모여 벌초하고, 성묘하고 하는 것도 제 각각이고 조카들의 얼굴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어 우리 아들 세대에 가면 서로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다. 그때 이 납골묘는 어찌 될까? 식사를 하면서 이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식사를 마친 벌초하던 분이 뜬금없이 말을 꺼낸다.

“여기 산소 쓸 때 지관한테 물어봤나?”
“???...”

작은아버지께서 툭 치시면서 소리 없이 입술로만 말씀하신다.

 “이 사람이 땅 잡아준 사람이여”

 작은아버지 말씀을 듣고 나니 속에서 부아가 치민다. 사실 이 땅은 접근로가 몽땅 막힌 盲地였다. 그래서 상여가 들고 날 때, 납골묘 공사할 때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특히 땅을 잡아준 이 사람이 더 극성스럽게 우리에게 애를 먹였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지관한테 물어봤느냐고? 나는 그 사람이 지관인 것을 모르는 냥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곳이 배산임수의 명당터라고 하던데 임수치고는 강이 무척 멀리 있네요.”
“….”
“좌청룡 우백호라고 하던데 그렇게 보기에는 기세가 너무 약하구요.”
“….”

  어머니께서도 한 말씀 거드신다.

“옛날에 산소가 떠 내려 간 적도 있슈.”

지관이 그제야 대꾸를 한다.

“그랬었지유.”




올해에는 아들들에게 벌초하러 같이 가자는 말을 못 했다. 이 녀석들이 바쁘기도 하지만 내켜하지 않는 녀석들을 막무가내로 끌고 내려가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들어 괜히 가족 납골당을 만들자고 했구나 하는 후회를 종종 한다. 아이들의 생활공간은 선산에서 점점 멀어져서 앞으로는 국내가 아닌 해외 어느 곳이 얘네들의 주무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선산에 모셔 놓은 납골당이 짐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 선산 바로 옆에 있는, 만들 때는 근사하게 만들어 놓았었지만 지금은 억새와 잡초가 무성한 어느 집안의 가족묘처럼 방치되지나 않을까?



작은아버지는 틈나는 대로 납골당에 가 잡초도 뽑고, 꽃나무도 심고 벌집도 제거하고 하여튼 이만저만 공을 들이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돌아 가신 뒤에는 우리가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나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이 문제도 또한 맹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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