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니고 히트펌프!
저는 한국에 살지만 미국의 한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을 합니다.
저희 회사는 쪼그마하지만 고객사들은 대기업이 많아요. 쉽게 말해 대기업이 고객에게 물건을 더 잘 팔게 도와주는 서비스를 판매하는 회사거든요. 미국과 캐나다의 에너지효율 리베이트 정책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판매하는데, 저는 직접 대기업을 상대하진 않고 뒷방에서 열심히 데이터를 보는 사람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대기업들의 제품을 많이 다루는 편인데요, 고객사가 덩치가 크고 판매하는 물건의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 저의 일은 늘어납니다. (최근 아마존이 고객으로 들어왔.... 껄껄)
제가 주로 다루는 제품은 고효율 가전 기기들인데요, 냉장고나 세탁기 등은 익숙하지만 유달리 낯선 제품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히트펌프(heat pump)라는 냉난방 기기인데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히트펌프를 아주 열심히 밀어주는 추세입니다. 에너지 효율적인 기기를 구매하는 경우 소비자는 제품 가격을 좀 비싸게 지불하는 대신 정부나 전력 회사에서 제품 가격의 일부를 돌려받을 수 있는데요, 일종의 보조금으로 볼 수 있겠죠. 이 보조금을 미국에서는 리베이트라고 부릅니다. (의약품 리베이트 아님)
아무튼 그런데 보통 세탁기나 건조기에 지급되는 리베이트는 기껏해야 20불에서 50불 정도에 그치는 데 반해, 히트펌프는 적어도 수백 불, 즉 수백만 원까지도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제품의 가격과 설치비가 비싸서 그런 거죠. 그래서 전반적인 리베이트 제도에서 예산이나 중요도에 있어 히트펌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큽니다. 그래서 히트펌프 제품들과 스펙에 대해서 줄줄 꿰게 되었는데, 정작 저는 그게 뭔지도 잘 모르고, 직접 본 적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사실...
히트펌프는 냉난방이 다 되는 에어컨 같은 것
그래서 한 번 찾아봤습니다. (일한 지 10년 차가 되어서야 찾아보는 부지런함(?)...) 히트펌프는 주로 이렇게 생긴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은 히트펌프 실외기인데, 한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에어컨 실외기와 비슷하죠?
전 세계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난방을 하는데요, 예전 한국에서는 연탄을 많이 쓰다가 이제 가스 난방을 많이 하죠. 서구권에서는 라디에이터나 난방용 오일을 지역들도 있고요. 히트펌프는 전기로 구동되는 냉난방 기기입니다. 쉽게 말해 에어컨이랑 비슷한데, 더울 때는 찬바람이, 추울 때는 더운 바람이 나오는 기기지요.
히트펌프는 냉장고나 에어컨과 원리는 비슷해요. 추울 때는 열을 '끌어다(펌프)' 공급해 주고, 더울 때는 열을 끌어다 밖에 버리는 거죠. 냉매를 통해 열 교환을 하는 원리입니다.
보통 히트펌프라고 하면 외부 공기에서 열을 회수하여 방식(Air Source Heat Pump, ASHP)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중의 열을 교환하는 지열식(Ground Source Heat Pump, GSHP) 등 다른 방식도 있습니다. 요 지열식 히트펌프의 경우 땅에 파이프를 파묻는 대공사를 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비쌉니다. 그래서 리베이트로만 수천 불을 지불하는 전력 회사들도 많답니다. (아래 매사추세츠 주의 리베이트 제도의 경우 무려 최대 2천만 원 가까이까지!! 지원 가능하다고 합니당)
한국에는 왜 없지?
히트펌프가 뭔지는 대충 알겠는데.. 왜 이리 익숙하지가 않은 거죠? 그건 한국의 난방 문화 때문입니다.
이제 어느덧 봄꽃도 지고 본격 여름을 향해 달려가는 날씨라서 좀 철에 안 맞기는 하지만, 한국의 추운 겨울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뜨뜻한 구들장입니다. 한국에서는 바닥을 따스하게 해서 몸을 지지는 것을 진정한(?) 난방으로 보죠. 집집마다 거실에 소파가 있으면서도 그 위에 앉기보다 등받이로 활용하는 한민족 특성상 '공기 난방'보다는 '바닥 난방'이 정서에 더 맞는 것 같아요.
이미 대부분의 아파트에 가스보일러를 이용한 바닥난방 장치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돈을 들여 그걸 뜯어고칠 이유는 없죠. 한국에도 히트펌프 업체들이 있기는 하지만 워낙 아파트 주거 문화가 발달하여 이들 업체에 개인적으로 따로 히트펌프 시공을 부탁할 일도 없습니다. 심지어 삼성과 LG는 해외에서는 히트펌프 기술로 유명하지만 정작 국내에선 히트펌프를 단종시키기도 했다죠. 게다가 지난겨울에는 가스비가 꽤나 올랐었지만, 그전까지는 가스 난방비가 히트펌프 설치비에 비해서는 비교도 안될 수준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그래서 한국에서는 유달리 히트펌프가 존재감이 없습니다. (지금 기사[1]를 찾아보니 바닥 난방식으로도 히트펌프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네요... 바닥 난방 때문에 히트펌프를 거부하는 건 핑계일 뿐?!)
히트펌프는 난방 전력화의 핵심
한국에선 인기도 없는데 왜 굳이 여기서 논의하고 있냐고요?
외국에서 히트펌프를 팍팍 밀어주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기후변화 대처에 히트펌프가 아주 효자이기 때문인데요, 기후변화의 주범 온실가스는 공장이나 자동차에서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냉난방은 온실가스 배출량의 7%를 차지하는데, 온실가스뿐 아니라 사실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도 중국의 석탄 난방과도 밀접하거든요. 이러한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으려면 핵심은 '전력화(electrification)'입니다. 모든 것을 전기로 구동한다는 것이지요.
전력화의 혜택은 전기차를 생각하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냉난방도 이와 비슷해요. 연탄은 태우면 거뭇한 연기가 나오는데, 이와 달리 전기 히터를 틀면 사용할 때마다 온실가스가 배출되지 않잖아요. (물론 전력을 생산하는 것도 화석 연료로 하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기기 사용 자체에서 온실 가스가 배출되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전력 소비량도 일반 전기 온풍기나 라디에이터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기후변화뿐만 아니라, 화석연료의 매장량이 유한한 까닭도 있기 때문에 전 세계는 결국 히트펌프 냉난방으로 가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그 많은 사람들의 냉난방 수요를 화석연료로 감당한단 건 애초에 불가능하단 거죠. 그리고 전기로 냉난방을 제공하는 게 바로 히트펌프란 겁니다. 게다가 히트펌프는 원리상 효율적입니다. 난방뿐 아니라 온수를 공급하는 데도 쓸 수 있거든요.
미국은 최근 Inflation Reduction Act라는 법안을 통해 히트펌프, 전기온수기 등 가정의 전력화 촉진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하는 일이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보니 얼마나 많은 새로운 히트펌프 지원제도가 생겨나는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과 유럽도 히트펌프를 꾸준히 밀고 있습니다. 독일은 내년부터 가스, 석유 난방의 신규 설치를 금지하는 법안을 최근에 승인하기도 했고요.
기존의 난방 인프라가 있기 때문에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주택이나 공공건물, 상업용 건물 등을 위주로 보급이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히트펌프 자체를 “재생 에너지원”으로 보는 정책적 시각도 필요할 거구요.
뜨끈한 구들장은 포기할 수 없을지 몰라도
주거 부문에만 히트펌프가 사용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전기 자동차에도 히트펌프 기술은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래 엔진을 구동하며 열이 발생하는 내연기관차에 비해 전기차는 히터 효율이 낮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전기차는 겨울철에 주행 거리가 30-40%나 줄어든다고 해요. (내연기관차는 한참 달리고 나면 보닛이 뜨끈뜨끈하잖아요? 그 열을 히터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외부 공기의 열 교환을 통해 히트펌프 방식으로 난방을 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난방을 할 수 있단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히트펌프 기술은 앞으로도 꼭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겨울철 뜨끈하게 등을 구들장에 지지며 귤을 까먹는 건 끝까지 포기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요.
[1]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1209020002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