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다른 두 지역에서 살아보고 느낀 점들
저희 가족은 5년 정도 미국에 살다가 홍콩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처음 만나면, "미국이 살기 좋아, 홍콩이 좋아?"라며 묻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과연 뭐가 좋고, 뭐가 아쉬울까?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홍콩은 좁다! 하지만...
홍콩은 정말 좁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의외로 중국 바로 코 앞까지 신계(New Territories) 영역이 펼쳐져 있어서 '생각보다는' 넓습니다만, 사실 외국인들이 주로 몰려 사는 곳은 홍콩 섬과 구룡반도 남단이니까요. 게다가 홍콩 섬은 가운데가 몽땅 산이라서, 바닷가에 다닥다닥 몰려 살아요.
어디 한 번 가려면 끝도 없이 차를 타고 달려야 했던 미국에 비하면 참 다른 라이프스타일이지요. 미국에서는 제일 가까운 슈퍼를 가려고 해도 차를 몰아야 하고, 조금 큰 몰에 쇼핑을 가려면 고속도로를 타고 20-30분을 달리는 게 일상이었는데, 홍콩에서는 그냥 집 앞에서 걸어서 대충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처음에는 어딜 보아도 하늘을 가리는 고층 아파트에 어지러워지기도 하고, 어딜 가나 그득그득 들어찬 사람들이 적응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좁은 땅이지만, 일상적으로 갈 곳은 더 많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세어보자면 드넓은 땅덩이의 미국에서 갈 곳이 훨씬 많지요. 입이 떡 벌어지는 국립공원만 해도 셀 수도 없고, 하나 골라서 가면 일주일은 있어야 대충 둘러보니까요. 그렇지만 워낙 넓은 탓에, 차로 대여섯 시간 가는 거리를 '가깝다'라고 말하는 아이러니가 생깁니다. (여기서는 차로 대여섯 시간 가려면 영토 내를 뱅글뱅글 돌아야 할 겁니다ㅜㅜ) 좋은 거 한 번 구경 가려면 날 잡고 가야 하고요. 뉴욕 시티 등 대도시 몇 군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집 근처는 휑뎅그레, 아무것도 없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홍콩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짧은 시간에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밀도가 높다는 건 구석구석 재미난 볼거리가 많단 거예요. (전에 도시 개발 관련 책에서 읽어보니, 거리에서 '모퉁이의 숫자가 많을수록' 재미있는 공간이 된다고 하더군요. 신시가지보다 구시가지가 흥미로운 이유도 불규칙하게 나오는 코너를 돌 때마다 펼쳐지는 다양한 풍경 덕이라고요.)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가면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식당들, 역사를 간직한 낡은 거리와 시장 덕에 여행 다니듯 일상을 보낼 수 있습니다.
미국은 사실 한 주(state)도 나라와 같아서, 서부에서 동부로 이사할 때 은행 계좌와 전화번호 빼고는 마치 다른 나라로 이사 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홍콩에서는 행여나 길을 잃어도 그냥 택시를 잡아 타면 언제든 집에 올 수 있다는 안전한 기분이 듭니다. 좁은 땅이라고 무조건 답답하고 지루한 건 아니란 거죠.
집도 좁기로 유명한 홍콩이지만, 그래도 워낙 고층이다 보니 내부가 좁아도 뷰가 좋은 아파트가 많고, 클럽하우스 등 아파트 시설이 발달해 있어서 한 번 익숙해지니 지낼 만합니다. 또, 미국에서는 눈폭풍이 와서 집에 갇혔을 때는 세상에 우리 가족만 덩그러니 있는 것 같았는데, 여기서는 태풍이 와도 수많은 이웃이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이랄까요. 오며 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라는 것이 참 다릅니다.
마음이 편하다
외모로 '다름'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홍콩으로 이사오자마자 가장 크게 좋았던 점은 외모만으로 제가 현지인인지 외국인인지 알 수 없다는 거였어요. 그렇다고 미국에서 인종 차별을 당한 건 아니었지만, 알게 모르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다르단 걸 느낀 일은 몇 번 있었거든요. (장을 보고 계산을 하는데 제 앞의 백인 할머니와는 다정한 태도로 폭풍 수다를 떨던 캐셔가 제 차례가 되니 입을 꾹 다물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 상황이라든가..)
하지만 이 곳에서는 저에게 너무 당연하게 광둥어로 말 거는 사람들은 있을지언정, 외국인이라고 다르게 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동양인이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외국인 신분에는 변함이 없지만, 거리를 걸을 때 느끼는 기분은 분명 다릅니다.
한국이 가깝다
맘먹으면 당일에라도 비행기표를 사서 세 시간 남짓이면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단 것도 홍콩의 장점 중 하나입니다. (이것도 코로나 전 얘기지만요ㅠㅠ 전에는 하루에 스무 대도 넘게 비행 편이 있었거든요.)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야 하니 심적인 거리감도 참 컸어요. 특히 동부에서 한국에 오는 건 너무너무 긴 비행이다 보니, 아이가 어릴 때는 그냥 포기하는 게 편했죠. 하지만 홍콩에서는 집에서 아침 먹고 느긋이 출발해도 한국에 도착해서 저녁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기 사시는 분들은 한국에 경조사를 참석하거나 치과 치료를 하러 한국에 들락날락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주말 부부를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만큼 가깝단 거죠.
슈퍼에서 느껴지는 동북아의 빠릿빠릿함
영화 주토피아(Zootopia) 보셨나요? 거기서 DMV 직원들을 나무늘보로 표현한 걸 보고 정말 빵 터졌는데요, 미국에서 살다오신 분들을 만나면 DMV에서 운전면허를 발급받은 경험으로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곤 합니다. 미국이 선진국이긴 하지만, 가끔은 이해가 안 될 만큼 느리고 비효율적인 서비스 때문에 답답하기도 했거든요. (그놈의 3 to 5 business days)
그 답답함이 홍콩에 와서는 싹 해소되었습니다. 일단 슈퍼 계산대만 봐도, 이 분들은 스몰토크 따위는 없습니다. 장바구니에 테트리스 쌓듯 효율적으로 물품들을 착착 정리하고, 잔돈 계산도 어찌나 빠르신지요. 한국에서 익숙한 동북아의 빠릿빠릿함이라고나 할까요.
또, 가구라도 사면 직접 집에 들고 와서 조립까지 했던 미국에 비해 이 곳은 좀 더 편리합니다. 미국에 비해 인건비가 저렴해서겠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대신 한국 생활에 좀 더 가깝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요.
외국인 친화적인 사회 시스템
홍콩에 이사 온 뒤 간만에 미국에 여행을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국경에서 죄를 지은 것도 없는 괜히 기가 죽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비자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외국인으로서 공권력 앞에서 항상 작아지곤 하는데요, 홍콩은 외국인이 워낙 많은 데다 내외국인 차별이 심하지 않아 살기가 더 수월한 것 같아요. 비자가 있으면 누구나 홍콩 아이디를 지급받아서 내국인과 마찬가지로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있고, 7년만 살면 영주권이 나오거든요. 영주권이나 시민권 장벽이 높은 미국과는 대조적인 점이죠.
언어와 기후 등, 불편한 점들
이제까지 보면 홍콩이 더 살기 좋은 것만 같지만, 사실 첫여름에는 미국 생활이 많이 그리웠습니다. 무엇보다 홍콩의 긴긴 여름은 정말 습하고 더워서 며칠만 내버려두면 창틀에 까맣게 곰팡이가 피는 건 예사고, 옷장 안에 제습제를 꽉꽉 채워 넣지 않으면 옷에도 하얗게 곰팡이 파티가 벌어지곤 합니다. 이 좁은 집에 에어컨이 5대고 제습기를 두 대 24시간 돌리고 있어요.
캘리포니아 베이 에어리어(Bay Area)에 살 때는 김을 먹다가 깜빡하고 식탁 위에 그대로 둬도 다음 날 바삭바삭했는데, 여기서는 밥을 먹는 도중에도(...) 습기를 머금어 축축해집니다. 덥고 밀도가 높으니 바 선생님과 모기가 기승을 부리고요. 식당이나 슈퍼에서도 바퀴벌레가 슬금슬금 기어 다녀서 직원에게 뭐라고 하면 마치 파리 보듯 대수롭지 않게 넘깁니다. (사진 첨부하려다가 혐사진이라 넘어가기로..)
또, 언어도 문제입니다. 미국은 한국어 다음으로 익숙한 언어인 영어를 쓰는 국가니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는데, 홍콩은 일상적으로 모두 광둥어를 쓰거든요. 외국인인 걸 알면 영어로 말해 주지만 영국식 발음과 어휘에 홍콩식 악센트가 가미되어 처음에는 알아듣기 쉽지 않습니다. 영어를 대부분 할 줄 알긴 한다지만, 이상하게 꼭 택시 기사님들은 광둥어만 주로 하십니다. 현지 사람들이 자기 땅에서 자기 언어를 쓰는 건 당연하니, 외국인인 저희가 노력해서 숫자나 지명 등은 광둥어로 알아 놓는 것이 필요하지요. 광둥어를 조금이나마 배워 보려고 해도, 홍콩에 얼마나 살지 모르는데 만다린도 아닌 광둥어를 배우기에는 언어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 포기했습니다.
이렇게 다른 점이 많지만 미국과 홍콩이 비슷한 점이 하나 있는데요, 한국에 비해 에너지와 자원 절약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 듯 합니다..ㅠㅠ 실내에 들어가면 온몸이 소름이 돋을 만큼 빵빵하게 에어컨을 틀어 놓고, 슈퍼에서도 고기나 냉동식품에 비닐봉지를 아낌없이 씁니다. (홍콩에서는 장바구니를 들고 가지 않으면 비닐봉지에 값을 받기는 합니다만, 그럼 뭐해요. 과일이나 야채, 고기 등을 구매하면 하나하나 얇은 비닐봉지로 싸 주는걸요.) 재활용도 그만큼 열심히 하지 않고, 음식물 쓰레기도 몽땅 한 쓰레기통에 버리고요. 주부로서 편한 마음보다 지구에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지는 요즘, 한국처럼 엄격한 제재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작 몇 년 살아본 것으로 미국살이와 홍콩살이를 논하기는 어려우니, 이 외에도 많은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비슷한 점은 비슷한 대로, 또 다른 점은 다른 대로 각국의 매력이겠죠? 어서 이 팬데믹 시대가 지나가서 지금 사는 이 곳의 매력을 좀 더 흠뻑 즐겼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