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Feb 20. 2024

현타가 왔다

이번에는 왠지 우울한 글이 될 것 같다.


지난주에는 이 책을 읽었다. <나와 퓨마의 나날들(The Puma Years)>라는, '와이라'라는 이름의 한 암컷 퓨마와 맺은 인연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어버린 한 영국 여성의 이야기다. 어릴 <야성의 엘자>라는 영화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보았던 나였던지라, 기대가 충만하여 책장을 열었다. 

로라 콜먼, <나와 퓨마의 나날들>

정글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볼리비아라는 낯선 땅, 그것도 개발이 전혀 안 된 야생동물 보호소에서 지내는 삶이라니. 더럽고, 습하고, 벌레가 우글거리는 불편한 생활이지만 원래 한 달 일정으로 머물던 작가는 자꾸만 떠나는 일자를 뒤로 미룬다. 영국에서 예술을 배우며 곱게 자란 그녀로서는 생고기만큼이나 날것의 그 경험이 무엇보다 강렬했으리라 생각한다.


동물보호소를 덮친 산불 속에서 절망을 맛보기도 하고, 거친 퓨마가 마음을 열어주며 생명의 경이에도 눈을 뜬다. (퓨마의 혀는 까슬까슬해서 팔을 핥으면 아프다고 한다. 악, 그 느낌이 너무 궁금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100% 몰입하기 어려웠다. 분명 많은 국가에서 좋은 평을 받은 인상적인 책이며(제인 구달 님도 극찬하심), 국내 판매량도 상당히 높은 듯하다. 최근 푸바오가 몰고 온 '동물과 사람의 교감'이라는 콘텐츠의 열풍도 어느 정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책 자체가 가진 매력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 가시가 박힌 듯이 이물감이 들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삶의 궤적마저 바꾸어서 동물 보호와 환경 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있는 그녀인데, 순수하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좋아하는 책에 푹 빠졌다가 나온 풍성한 만족감의 90퍼센트 정도는 들었다. 하지만 10퍼센트의 껄끄러움은 여전히 남았다. 대체 뭐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글의 습기처럼 감성이 한껏 묻어있는 텍스트가 원인이었던 것 같다. 부자 나라에서 온 아가씨가 가난한 나라에서 그곳의 동물과 사랑에 빠졌다고, 동물들을 구하겠다고 선언하는 모양새가 왜인지 모르게 마땅치 않았다. 나도 아기 판다 푸바오에 푹 빠졌으면서, 동물이 나오는 영화는 눈알 빠지게 울면서 보면서, 왜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야생 원숭이들과, 퓨마와, 재규어와, 앵무새와 사랑에 빠진 게 뭐 어때서. 그녀는 말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인생을 바쳐 그들을 돕고 있는데 왜? 


사실은 내가 스스로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퓨마를 사랑한 로라 콜먼의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실은 내가 문제였다. 실제의 삶의 현장은 어떤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상에만 가득 찬 모습이 사실은 내게 있었다. 우연히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에 대해 공부를 하고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하며, 쉬운 언어로 딱딱하지 않은 글을 쓴 지도 수년이 되어 간다. 내 이름을 걸고 출간까지 했다. 하지만 과연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기후에 대해 떠들어댈 자격이 있는가? 부자 나라에서 온 아가씨가 가난한 나라의 동물 보호를 하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피상적인 게 내 모습 아닌가. '현타'가 왔다. 


처음에는 일반 대중에게 관련 지식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로 뭘 할 수 있을까? 글이 가진 힘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사실 나는 기후 위기가 가져오는 진짜 폐해에 대해선 이론 말고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책으로 읽고, 다큐멘터리로 보고, 뉴스레터로 접했을 뿐이다. '기후 위기에 신경 써 주세요'라는 말이, 마치 하루하루 살아내기 버거운 사람들에게 '너 왜 자기 계발 안 해?'라고 묻는 것이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도 별로 다르지 않다. 


얼마 전, 미국 최대의 축제 슈퍼볼이 열렸다. 마침 승리팀 캔자스시티에는 걸어 다니는 기업이 되어버린 테일러 스위프트의 남자친구가 있다. 심지어 이번 승리에서 중요한 공을 세웠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월드 투어 중이었는데, 일본 공연을 마치고는 전용기를 타고 날아가 남친을 보고, 다시 전용기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고 한다. 혹자는 그저 '갓생'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해외 언론에서는 그녀에 대한 비판적 기사가 실렸다. 본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무시하고 어마어마한 탄소발자국을 남기면서 개인 용무를 보았다는 것이다 [1]. 실제로 비행기를 타는 개인의 탄소 배출량은 매우 큰데, 상업용 비행기가 아닌 그녀와 소수의 스태프만을 위해 운행되는 전용기의 탄소 발자국은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날 것이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신의 탄소발자국을 상쇄하기 위해 그 이상의 배출권을 구매했다고 밝혔다고 하지만, 오프셋 제도에 대해서는 할많하않...)


한국 언론에도 이와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댓글들을 읽어 보았다. 대체적으로 "'내돈내산'인데 뭐가 문제냐"는 태도가 우세했다. 더 나아가 "환경충"이니, "환경주의 지긋지긋"이니 하는 말들도 보였다. "이런 걸로 비판하는 사람은 차도 타지 말고 전기도 쓰지 말고 원시인처럼 살아라"는 날 선 목소리도 있었다. 나도 너무도 무슨 마음인지 안다. PC에 지겨워진 대중처럼, 환경주의는 너무도 많이 소비되었고 피로감을 부추긴다.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지구가 망해요"라는 말이 이제 대중의 귀에는 지겹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얘기를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와 퓨마의 나날들>에서 내가 느낀 약간의 불편함이 로라 콜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테일러 스위프트 전용기 이슈도 그녀 개인을 공격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를 좋아하고 아끼는 팬들도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무엇보다 탄소 발자국을 만천하에 다 보이도록 쿵쿵 찍는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필요하지 않을까. "죄가 없는 자만이 돌을 던져라"라고 한다면 우리 중 누구도 그녀를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돌을 던지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근데 너 영향력이 장난 아니거든. 다음에는 그런 부분도 좀 생각해 줄래?"라는 말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올해는 '선거의 해'라고 한다. 그것도 '슈퍼 선거의 해'다. 전 세계 76개국에서 선거가 치러지며, 무려 40억 명의 유권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많은 투표소에서 기후 문제는 얼마나 도드라질 수 있을까? 기후라는 의제가 선거의 당락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이를 '기후 선거'라고 한다. 아마 올해의 선거도 지구 대부분에서는 기후 선거가 아닌 경제 선거나 안보 선거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실제로 기후 선거를 치른 국가들도 있긴 하다. (자세한 건 아래의 유튜브 영상 참고!) 청정 국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기후 악당(!) 중 하나인 호주의 경우 2022년 기후 선거를 치렀다. 호주는 2020년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인하여 (남한만큼의 면적을 태웠다고ㅠㅠ)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기후 문제가 본격적으로 정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m8dToWZFtAc


그러나 '기후'라는 말에 지긋지긋함을 느끼는 많은 대중들에게, 기후 선거 또한 요원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조금의 도움은 될까? 여러모로 현타가 오는 요즘이다.   



* 표지 이미지: 웹툰 <대학일기> 중  

[1]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128122.html

 




매거진의 이전글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