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낳은 둘째가 만 4살이 넘었다. 한국에 귀국한지가 벌써 4년이다.
한국 나이로는 5세. 보통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등의 기관을 다니는 것에 더해 학원을 다니기도 하는 나이가 되었다. 물론 아직은 어려서 다닐 수 있는 학원의 폭은 넓지 않다. 태권도나 미술, 놀이체육이나 축구 정도다. 그나마도 5세 반이 있는지 학원 측에 문의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 둘째도 몇 달 전부터 집 근처 태권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유치원에 다녀와서 심심해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유치원이 정적인 활동이 많은 편이라 활동적인 시간이 필요할 것 같기도 했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글씨를 쓰는 데 재미를 붙여서, 하원 후에도 책상에 앉아 혼자 노는 경우가 많았다. 그 뒷모습을 보다 태권도장에 보내 보기로 결정했다.
도복을 입은 둘째의 조그만 뒷모습을 보니, 8살 터울 첫째가 홍콩에서 태권도를 다니던 생각이 자연스레 났다. 첫째는 벌써 만 12살이니, 벌써 오래전 이야기다. 외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한국 문화를 접해보라는 마음으로 태권도장에 1년 반 정도 보냈었다. 홍콩에서도 태권도가 제법 인기가 있어 동네에 도복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었는데, 우리 아이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홍콩과 한국의 태권도장은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르고, 한국에서 몇 달 보내보니 태권도장이 단순히 태권도를 배우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말한 "제3의 장소"가 바로 한국의 태권도장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의 동네 태권도장들은 유소년들에게 지, 덕, 체를 함양하는 복합 교육 공간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나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홍콩과 한국 태권도장의 차이점을 나열해 보겠다.
1. 태권도만 1시간 vs. 다양하게 50분
가장 큰 차이는 뭐니 뭐니 해도 홍콩의 태권도장은 태권도만 하고,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 지금 둘째가 다니는 도장은 관장님의 철학이 태권도에 집중하여 다른 태권도장과는 차별화시키는 것인데도 그렇다. 다른 도장들에 비해 태권도의 비중이 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째는 태권도를 가서 50분의 수업 시간 동안 체력 측정, 줄넘기, 레크리에이션 등 각종 활동을 하고 온다. 요일마다 하는 활동이 달라서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이 예정된 날에는 어찌나 기대하는지 모른다.
피구를 하고 땀범벅이 되어 나오는 날은 도복이 제멋대로 몸에 걸쳐져 있어 주취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초등 정도부터는 주말에도 물놀이, 밤 줍기, 인라인 스케이트, 스키장, 영화 감상 등 나들이를 가기도 한다. 여름에는 도장에서 화채를 해 먹기도 하고, 성탄절 즈음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기도 한다. 어떤 도장들은 슬립오버 이벤트를 하기도 한다고.
홍콩에서는 태권도장에서 태권도만 한다. 물론 아닌 도장도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우리 동네의 모든 태권도 학원들은 그랬다. 당시에 나는 아이를 데려다주고 밖에서 수업을 구경하며 기다렸기에, 1시간 내내 집중해서 태권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지한 모습이라곤 없는 아이가 차렷 자세를 하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인데, 1시간 동안 내내 태권도를 하다니 그것부터 진기한 풍경이어서 기억에 깊이 남는다.
2. 주 1회 vs. 주 3-5회
그렇다고 한국 태권도장이 태권도에 소홀하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가는 횟수가 많기 때문에!
홍콩의 태권도장은 기본적으로 주 1회였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절, 학교도 문을 닫고 전혀 할 일이 없어 우리 아이는 주 2회를 다녔는데,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대개 주 1회를 다니고, 가격표도 그에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가격은 당연히 홍콩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주 1회 한 달 가격이 주 5회 한국 가격보다 비싸다... 그건 물가 차이로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월세가 몇백 만원씩 하는데 당연하지 뭐 투덜투덜)
친구들을 통해 듣긴 했지만 한국에 와서 태권도장을 알아볼 때 나는 횟수가 너무 많아서 놀랐다. 5회가 기본이고, 3회나 4회도 가능은 하다고. 그렇다고 5회 가격이 주 1회 가격의 다섯 배인 것은 당연히 아니다. 홍콩의 인텐시브 한 태권도 레슨을 생각하면 주 5회를 하면 조만간 태권도 선수가 될 것 같은데, 다양한 활동을 하다 보니 그게 가능한 것이었다.
학원의 시스템 자체가 다른 부분이다.
3. 버스, 핼퍼 vs. 학원차, 도보
첫째가 다니던 태권도장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어서, 홍콩의 찜통더위 속에서는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었다. 지하철 역으로는 한 정거장, 버스로는 두세 정거장 정도였는데, 우리는 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당시 우리 집에는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필리핀 헬퍼 아주머니가 계셨지만 (홍콩의 가사도우미를 '헬퍼'라고 부른다), 아이 케어는 내가 했기에 나는 배가 만삭이 될 때까지는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태권도를 다녔다.
홍콩의 태권도장은 상가 건물에 위치해 있었는데, 많은 경우 헬퍼가 아이들을 데리고 태권도장에 왔다. 데려다주고 장을 보거나 집에 갔다 와도 되지만 나는 주로 복도에서 아이를 구경하거나 책을 읽으며 기다리곤 했다. 홍콩은 인구 밀도가 워낙 높아서 그런지 앉을 곳을 찾기가 무척 힘든데, 그 상가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아이들의 보호자들이 도장 밖 복도에 길게 주저앉아 아이를 기다리는 모습이 흔했다. 처음에는 서서 기다리거나 뭔가 깔고 앉던 나도, 나중에는 그냥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아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국은 학원차 문화가 발달했다 보니 아이들이 학원차를 타고 도장에 오는 경우가 많다. 학교가 끝난 뒤 차량이 아예 학교 앞에 가서 아이를 데려오기도 하고, 아니면 아이가 혼자서 걸어오기도 한다. 우리 둘째는 아직 어려서 내가 데려다주고 데리고 온다. 수업이 끝나고도 우리 아이는 제일 어려서 엄마가 온 걸 보고 내보내 주시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꾸벅 인사를 하고 알아서 집에 간다. 아니면 사범님이 직접 운전하시는 차량을 타기 위해 도장에서 놀며 기다린다. 홍콩에 익숙했던 내게 이 모든 풍경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4. 사범님으로서의 사범님 vs. 보호자로서의 사범님
홍콩의 도장에는 행정을 보시는 분이 따로 계셨다. 수업 안내, 상담, 결제 등은 모두 그분을 통해서 했고, 사범님은 오로지 수업만 하셨다. 한 번은 직원 분이 오시지 못해 사범님께 결제를 하려고 했는데, 결제 자체를 하실 줄 몰라 난처해하신 적도 있다.
한국의 도장에서 사범님은 대부분 만능이신 것 같다. 관장님이 상담과 결제, 차량 운행까지 하시는 경우가 많고, 우리 둘째 도장의 경우 주차 등록 같은 소소한 업무도 모두 해 주신다. 동네를 지나가다 보면 사범님께서 직접 초등학교 앞으로 걸어가셔서 아이들 손을 잡고 도장으로 걸어오시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는 도장이다 보니 그런 듯하다. 사범님은 단지 태권도를 가르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아이들의 보육 공백 시간을 책임져 주시는 보호자다. 처음에 아이가 태권도를 다니기 시작할 때는 아이가 어리다 보니 내심 걱정도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도장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안심이 되었다. 예전에 홍콩에서 첫째가 태권도장에 다닐 때는 수업 외의 시간(줄을 서거나 수업 전후로 대기하는 시간)에는 아이가 행여나 다른 아이와 다투거나 돌아다니다 다치면 순전히 보호자의 책임이었는데, 한국은 일단 사범님의 손에 아이를 넘겨 드리면 그다음부터는 사범님이 알아서 해 주시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도 분명하다.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도복을 입고 모여 태권도를 배운다는 점.
실력이 늘어갈수록 바뀌는 띠 색깔.
도장 한 면에 걸린 태극기.
"감사합니다"라는 한국어 인사. 홍콩 아이도 브라질 아이도 이탈리아 아이도, 우리 아이의 자신감 넘치는 "감사합니다"를 따라서 외치던 기억.
규율, 진지함, 자부심.
홍콩에서는 내 아이가 한국인인데 한국인 사범님께서 운영하는 태권도장을 다녀서 좋았고, 한국에서는 아이가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해서 좋다.
홍콩에서는 한국어로 말할 기회가 없는 아이가 적어도 품새의 구령과 인사말만큼은 한국어로 크게 소리칠 수 있어 좋았고, 한국에서는 아이가 규칙과 어울리는 법을 배워서 좋다.
그러나 나는 특히 한국의 태권도장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오래도록 유지하면 좋겠다. 집도 학교도 아닌 '사랑방'과 같은 공간으로서의 태권도장은 분명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고유의 무술인 태권도를 배우지만 태권도만 배우는 것은 아닌 이 제3의 공간.
최근에 화제가 된 <경험의 멸종>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 진정한 공동체에는 대면 상호작용과 상호 의존성이 필요하다면서 제3의 장소는 이를 제공하는 일에 탁월하지만 가상세계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불가능할 거라고 강조했다. (p.285)"
디지털 디바이스와의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아이들인데, 물리적이고 실질적인 제3의 공간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이유다. 뻣뻣한 도복의 질감을 느끼며 맨발로 땅바닥을 딛고 서는 아이들. 연령은 제각각이지만 같은 품새를 배우고 같은 사범님을 공유한 아이들. 걸어갔다가 걸어올 수 있는,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가 있는 장소. 이런 것들이 가상 세계에 점점 익숙해질 아이들에게 유년 시절의 닻이 되어주지 않을까.
둘째가 오래오래 태권도를 다니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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