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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n 02. 2023

46층에 살았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홍콩에서 2년씩 두 집에 살았었는데, 첫 집은 46층, 두 번째 집은 43층이었다. 


그렇다고 꼭대기층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 아파트가 각각 62층과 73층이었으니 중간층(?)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아이의 친한 친구 중에는 73층 중 62층(!)에 사는 아이도 있었는데, 그쯤 되어야 고층이라 할 수 있다. 손바닥만한 땅에 아파트를 지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다 보니, 이렇게 자꾸만 높아지는 게 홍콩 주거의 특징이다. 

고층, 고층, 초고층... (이미지: Engel & Volkers) 

내 회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데, 미국에 살다가 홍콩으로 이사를 가서도 재택근무로 쭉 일을 했다. 보스와 처음으로 회의를 하는데, 홍콩은 살 만하냐고 묻길래 "응, 아파트가 46층이고 700 스퀘어풋이 안되기는 하는데 생각보다 살만 해."라고 하니, "WHAT?!? 46?? You mean 40 and 6??"라고 거듭 물으며 놀라워했다. 드넓은 캘리포니아의 마당 있는 2층집에 사는 그녀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풍경이리라. 하긴, 63 빌딩도 63층인데 73층이라니, 아파트 문화에 익숙한 한국에서도 드문 일이기는 하다. 



초고층 아파트에서 필수적인 것은 뭘까? "고속 엘리베이터"다. 73층짜리 아파트에는 한 층에 8집이나 있었으니, 고속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일상이 불가능하다. 물론 엘리베이터도 한 대가 아니라 3-5대는 기본이고, 모두 무척 빠르다. 홍콩은 이상하게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마저 빠른데, 코로나 때문에 한참 귀국을 못하다 오랜만에 귀국했을 때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굼벵이처럼 느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엘리베이터가 빠르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홍콩의 대단지 아파트들은 주상복합처럼 아래에 버스 차고지나 클럽하우스가 자리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파트가 1층이나 2층에서 시작하진 않는다. 저 73층짜리 건물은 제일 낮은 층이 7층이었다. 6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서 각자의 층으로 올라가는 구조다. 아는 분이 7층에 사셨는데,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자기 층수를 찾아 누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는 이미 출발해서 7층을 슉 지나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수십 개니 위치를 기억하지 않는 한 골라서 누르는 데 한참 걸리게 마련. 엘리베이터가 빠른 나머지 7층은 물론 눈 깜빡할 사이에 20층 정도까진 금방 간다. 한 층 정도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고 누군가는 묻겠지만... 글쎄, 홍콩의 아파트 계단은 바퀴벌레 천지다. 살아있든 죽어있든, 바선생님 영접하고 싶지 않으면 층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엘리베이터를 고수하는 게 낫다. 


이건 두바이라는데, 아무튼 약간 이런 식이다. (이미지: Insider) 



무섭지 않아?


내가 사는 층수를 말하면 친구들이 늘 묻곤 했다. 그런데 의외로 무섭진 않다. 어차피 20층이나 40층이나 60층이나,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리는 건 똑같아서일까? 오히려 20층 정도의 저층은 무서운 느낌이 드는데, 40층 넘어가면 멋진 풍경화가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아 그다지 무서운 느낌은 아니다. (뷰는 끝내준다) 다만 유리로 둘러진 발코니에 나갈 일이 있으면 그때는 약간 오금이 저렸다. 


아, 엄청 무서울 때가 있기는 했다. 2018년 여름이었다. 홍콩은 아열대 지방이다 보니 태풍 경보 시스템이 잘 발달되어 있는데, 단계별로 경보를 발령하고 그에 맞춰 프로토콜을 딱딱 지킨다. T1, T3, T8 등으로 나뉘는데, T1이면 스탠바이고, T3부터는 강풍으로 본격 태풍이다. 유치원은 T3부터 등교하지 않는다.

홍콩의 태풍 경보 체계

T8이면 모두 퇴근한다. 가게도 관공서도 닫고, 지하철은 다니지만 대중교통도 다니지 않는다. 택시도 탈 수 없는데, 사정해서 탄다 해도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바람에 떨어지는 물체에 사고라도 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둘째를 임신해서 만삭일 때 T8 태풍이 연속으로 와서 어찌나 겁났는지 모른다. 새벽에 진통이 오면 T8 속에서 나는 집에서 애를 낳아야 하나....)


아무튼 2018년, 길이길이 회자될 T10짜리 태풍, "망쿳"이 왔다. 태어나서 그렇게 심한 태풍은 처음 봤다. 태풍은 일요일 오후쯤 사그라들었는데, 월, 화는 도로가 복구되지 않아 학교도 쉬었다. 다음날 아침 나가 보니 바닷가 나무들이 전부다 파업이라도 한 듯 누워 있었고, 뿌리째 뽑힌 나무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바닷가 식당 중 한 곳은 유리창이 몽땅 깨져서 한동안 영업을 하지 못했다. 우리도 집에서 X자로 창문에 테이프를 붙여 놓고 비상식량을 쟁여두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막상 태풍이 오니 그 위력이 생각보다도 훨씬 무서웠다. 


제일 무서운 건 아파트 자체가 흔들흔들거리는 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단단히 잠가 놓은 창문이었건만 실리콘 마감이 낡았는지 그 틈을 통해 비가 흘러들어와서 물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창문 가까이 가서 수습하기가 겁이 났다. 건물 자체가 바람을 따라 휘.청.휘.청.거리는 것이 느껴져서, 이대로 62층짜리 건물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 고층에 살아서 무서웠던 기억은 그때가 유일하지만,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다. 

2018년 태풍 "망쿳" 이후.. (이미지: CGTN)

그러던 우리가 한국으로 이사했다. 그것도 아주 땅에 가까이 살게 되었다. 


지난 1년 반 사이 부쩍 큰 덕도 있지만, 여기서 큰애는 혼자서 학원차도 타고 집 앞 가게도 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엘리베이터 타는 게 걱정이 되지 않아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는 아이가 큰 소리를 지르면 창문으로 내다보면 된다.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가깝고, 표정도 읽을 수 있다. 홍콩에서는 엘리베이터를 혼자 태우는 것이 그렇게도 망설여졌었다. 고장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고속 엘리베이터라도 너무 긴 거리(?)다. 아파트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주로 광둥어를 하시기 때문에 비상 버튼을 누른다 해도 말도 잘 통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아이는 항상 엄마와, 아니면 헬퍼와 함께 외출했다. 아주 가끔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어 하면, 혼자 태워서 올려 보내고 우리 층에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곤 했다. 


홍콩에서 한국으로 이사하며 평수를 점프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는 수직낙하하여 땅으로 착지했다. 헬리콥터 대신 가로수가 눈높이에서 보이는 느낌은 아늑하고 안전하다. 끝내줬던 오션뷰는 아쉽지만, 옆집 꼬마가 지나가면 창문을 열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높이라 좋다. 하늘 위 섬 같던 홍콩의 우리 집은 코로나와 함께 정말로 섬이었단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 높은 곳에 라푼젤처럼 갇혀 하루하루를 답답하게 지냈다. 아마 그때는 한국도 지금 같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흙냄새 가까이 사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도 언젠간 다시 가보고 싶다. 46층, 43층의 우리 집.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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