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물을 깜빡하고 등교했을 때, 늦은 밤 엄마 몰래 살금살금 귀가했는데 안방 불이 아직 켜져 있을 때, 회사에서 중요한 예산안을 잘못 작성했을 때...
내 심장은 바로 어젯밤, 또 한 번 쿵 하는 순간을 맞았다.
책을 가지러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대수롭지 않게 불을 탁 켰는데, 그분이 계셨다. 하얀 벽에 달라붙어 긴 더듬이를 옴짝거리는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지금 크리스마스가 다 됐는데 이 추운 겨울에 왜 지금 거기 계시는 겁니까ㅠㅠㅠ
홍콩에 살며 바퀴벌레와의 조우는 낯설지 않으나, 만남의 순간 온몸을 감싸는 패닉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상황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랄까. 몇 년 간 바퀴벌레 출몰 사건을 겪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다. "꺄악!"하고 소리 지르며 구원병(=남편)을 부르는 동안 그것은 빛의 속도로 이동하실 것이며 한 번 놓치면 다음에 출몰하실 때까지 나는 살얼음을 밟는 기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꺄악!"은 그대로 하되, 손에 잡히는 가장 큰 책을 집어 그분을 살상하는 대처 기제가 발달했다. 가장 큰 책이라 함은 충분히 두꺼워서 그분의 촉감이 손에 전달되지 못해야 하며, 충분히 넓어서 더듬이나 다리 등 그분의 신체 일부가 튀어나와도 내 손에 닿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제도 그렇게 살상을 자행했다. 시체 처리는 아직 미숙하여 구원병에게 맡긴다.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다. 어디서 들어왔지? 얼마 동안 집에 있었지? 집에서...알이라도 깠으면 어쩌지?
홍콩 생활은 바퀴벌레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냥 바퀴벌레가 무지하게 흔하기 때문이다. 그냥 많다. 길거리에도 많고 아파트 계단에도 많으니 걔네들이 집에도 들어온다. 이웃에서 방역이라도 하면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길거리에서는 바퀴벌레 중 그나마 내가 가장 선호하는 타입, 즉 죽은 바퀴벌레를 자주 볼 수 있다. 주로 슈퍼마켓이나 가게에 화물이 드나드는 출입구에서 볼 수 있는데, 트럭 바퀴나 박스 밑에 깔려서 유명을 달리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 녀석들은 정말 말도 안 되게 커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걷다 보면 그래도 비교적 쉽게 피할 수 있다. (그래서 난 홍콩에 와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걷는 습관이 생겼다.)
슈퍼마켓 진열대나 식당 구석에서는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볼 수 있는데, 항의해도 그다지 소용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한국에서 파리를 보듯 홍콩에서는 바퀴벌레를 본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럴듯하다. 즉 여름철 식당에 파리 한 마리가 돌아다닌다고 엄청난 일이라곤 할 수 없듯이, 여기도 바퀴벌레가 눈에 띈다고 항의를 받거나 문을 닫아야 하는 사항은 아닌 것이다. 그냥 알아서 피하는 수밖에 없다.
집에서 출몰하는 놈들은 정말 곤란하다. 오히려 너무 큰 녀석이 보인다면 외부에서 어쩌다 들어온 애라서 걔만 처리하면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아기 바퀴벌레들이 보이면 그건 정말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다. 어디선가 알을 깠다는 이야기니까.
한국 분들은 홍콩으로 이사 올 때 필수 목록으로 특정 브랜드의 살충제를 싸가지고 오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홍콩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살충제에는 내성이 있어서 그다지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부엌 밥솥 옆에서 쏜살같이 질주하는 한 마리의 바선생을 보고 전광석화같이 일반 살충제를 뽑아 들었으나, 살충제로 목욕을 할 만큼 듬뿍 뿌려도 그 속에서 유유히 수영하여 도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기겁한 바 있다. 그 후 꼭 주기적으로 한국 약을 짜 놓는데, 굳으면 새로 짜 놔야 한다. 굳은 건 또 안 드신단다.
우리 집은 주변 지인들과 비교했을 때 바퀴벌레로 골치를 썩인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벌레가 비켜간 집에 가까웠다. 상주한(?) 녀석을 한 마리 알고 있기는 한데, 걔는 부엌 3단 서랍을 위아래를 오가며 가끔 출몰해서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덕분에 서랍 안에 넣어둔 수저 소독만 자주 했다.) 그분을 살상하고 나서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다. 때마침 에어컨이 고장 나서 일하시는 분들이 왔다 갔다 하느라 문을 계속 열어둔 날이었다.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어두운 거실에 나와서 불을 탁, 하고 켰는데... 그런데...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소파 아래에서 더듬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대패닉이었다. 그만한 바퀴벌레는 태어나서 본 일이 없어서 초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구원병께서는 퇴근 전이었기에, 나는 홀로 엄습하는 공포를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그분은 엉금엉금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 손에 두꺼운 책을, 다른 손에 살충제를 들고 꼼짝 않고 기다렸다. 남편이 퇴근해서 올 때까지 부동자세로. 마침내 그가 오자 나는 횡설수설하며 지금 당장 소파를 들어내야 한다고 울음 섞인 하소연을 했고, 우리는 소파를 아예 벽에서 떼 내서 아래를 살폈다.
없었다.
내가 분명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었는데. 없어졌다. 주변을 아무리 뒤져도, 소파 쿠션 사이사이를 들춰 봐도(물론 남편이) 행방이 묘연했다. 남편은 그사이 나갔나 보다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내가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은 온통 그 괴물 바퀴벌레 생각뿐이었다.
다음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대왕 바선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일상은 흘러갔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소파에 단 한 번도 앉지 못했다) 두어 달이 지났을 시점에 내 생일이었다. 그날도 아이를 눕히고 거실로 나와서 탁 불을 켰는데, 마치 데자뷔처럼 똑같이 그 녀석이 있었다. 소파 아래, 같은 곳에서 더듬이를 움직이며.
그날은 구원병이 계셨다. 내 부름을 받은 그는 황급히 나와서 그 녀석을 처리하려 했지만, 바퀴벌레는 너무나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파 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맙게도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내 슬리퍼를 꿰어 신은 그를 본 나는 그의 전략, 즉 '밟아 죽이기'를 진심을 다하여 응원했다. (내가 옆에서 너무 소리를 지르자 나의 반쪽께서는 제발 방 안에 좀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결국 소파 아래에서 TV 스탠드 아래로 도주를 시도하던 대왕 바선생께서는 남편의 슬리퍼를 피하지 못하고 사망하셨다. 남편은 혹시나 내가 그분이 부활할까 전전긍긍할까봐 걱정이 됐는지 휴지로 사체를 감싸고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는 것까지 보여 줬다. 항상 고맙고 좋은 사람이지만, 그 날처럼 배우자가 위대해 보이고 사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아직도 궁금하다. 그 녀석은 몇 달 동안 소파 아래에서 살았던 걸까? 밤에는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아다녔을까? 그리고 왜, 처음 봤던 날 소파를 다 들어내도 보이지 않았던 걸까? (소파 바닥 아랫면에 꼭 붙어 있었던 거라고 내심 결론 내리긴 했다.) 아무튼 기억에 남는 생일을 선사해준 녀석이다. 죽어줘서 너무 고마워ㅜㅠ다시는 보지 말자.
*표지 이미지 출처: dreamstime.com (읽는 분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최대한 귀여운 그림으로 골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