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소개글에 "해외 육아 7년 차"라고 느낌표까지 붙여가며 소개를 적으며 사실 저는 마음 한 구석이 슬쩍 찔렸습니다. 1년 여 전부터 헬퍼(helper)를 고용해서 요즘은 늴리리야 편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에요. 해외 육아의 고충은 도와줄 사람 없이 육아와 살림을 전담해서 한다는 데서 나오는데, 살림 만렙인 분이 집에 오셨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죠.
홍콩은 싱가포르, 두바이 등과 함께 헬퍼 제도가 있는 지역입니다. 한국에도 조선족 도우미 이모님들이 계시는데요, 그것과 비슷한 점이 있지요. 하지만 홍콩의 헬퍼는 출퇴근하며 아이 케어만 전담하는 것도, 그렇다고 청소와 살림만 맡아서 하는 것도 아닌, 집에서 상주하는 일종의 가족 구성원과 같은 개념입니다.
저는 홍콩에서 첫 1년 반 이상은 헬퍼 없이, 지금까지 1년 여는 헬퍼와 함께 지내 왔습니다. 처음에는 일요일에 길에서 밥을 먹고 낮잠도 자는 헬퍼들의 무리를 보고 문화 충격을 받기도 했고, 자기 아이들을 본국에 두고 남의 아이를 키우는 그녀들을 보고 마음이 안 좋기도 했습니다. 또, 헬퍼 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무수한 주변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에 별 사람 다 있구나' 싶기도 했고요. 그만큼 헬퍼들은 홍콩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서로 모르는 아기 엄마들이 "지금 몇 개월이에요?"로 시작해서 두어 시간은 가볍게 수다 떨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도 "저희 헬퍼 때문에 고민인데요.."라는 말은 낯선 이들도 대동 단결시키곤 합니다.
헬퍼 제도란 무엇인가요?
홍콩에서 헬퍼 제도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와 홍콩 정부 간에 정식으로 계약을 맺어서 인력을 수입하는 제도입니다. 1970년대, 홍콩이 빠르게 경제 성장을 하고 여성 인력도 사회 진출을 많이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쭉 성장세를 지속했다고 해요. 실제로 현재 홍콩 전체 인구의 5 퍼센트 가량이 헬퍼라고 하니,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셈이지요.
홍콩에 법적으로 거주하고 있고 어느 정도 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헬퍼를 고용할 수 있어요. 자기만 능력이 되면 한 명뿐 아니고 둘, 셋도 고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가 여럿이거나 쌍둥이가 태어난 가족, 또 부모가 둘 다 일이 바쁜 경우는 헬퍼가 둘 이상 있는 집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큰 집에 살아야 해요. 헬퍼는 반드시 고용주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하거든요.) 또, 대부분이 여성이기는 하지만 사실 여성만 고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도 고용할 수 있어서, 운전기사가 필요하거나 에너지가 많은 아이들이 있는 가족의 경우 남자 헬퍼를 고용하기도 합니다.
헬퍼는 무슨 일을 하나요?
헬퍼들은 정말 "시키는 모든 일"을 합니다. 지금 생각난 것만 나열해 보자면:
- 청소, 빨래, 설거지 등 가사 노동 전반
- 장보기
- 요리 등 식사 준비, 도시락 싸기
- 아이 돌보기(노인이나 반려 동물이 있는 경우 그들을 돌봅니다)
- 아이 학교/학원 데리고 다니기(간혹 영어를 잘하는 헬퍼들은 숙제를 봐주는 튜터 역할도 합니다)
- 차가 있는 경우 세차
- 그 외 심부름 등
등이 있는데요, 물론 집집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겠지만 대개 집안 살림 전반에 관여합니다.
헬퍼들은 일주일에 한 번을 쉬는데요, 보통 일요일에 쉬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주 6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데, 바쁜 집의 경우 새벽부터 시작해서 저녁 설거지와 정리가 끝나는 밤 9-10시까지 상당한 긴 시간을 노동하는 셈이지요.
헬퍼의 월급은 얼마인가요?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데 과연 월급은 얼마나 줄까요? 이 또한 홍콩 정부에서 법으로 정하고 있어요. 현재 기준으로 헬퍼 월급은 4,630 홍콩 달러로, 원화로 계산하면 약 70만 원 정도 됩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는 훨씬 적어서 5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해요. 그 외에도 만일 고용주와 식사를 따로 할 경우 한 달에 15만 원 정도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고용주가 식사를 나누어 줄지, 아니면 따로 식비를 주고 각각 식사를 해결할지는 각 가정이 알아서 정하고요. (저희 가족은 고민하다가 따로 식비를 주고 있는데요, 입맛이 맞지 않거나 식사량을 정확히 알지 못할 경우 불편함이 쌓일 것 같아서 그렇게 정했어요. 음식을 나눠 먹기로 했는데 아이들 주려고 사온 과일을 헬퍼가 다 먹어 버린다든지, 반대로 헬퍼 입장에서 고용주가 음식을 너무 적게 줘서 힘들어하는 경우를 봤거든요. 이런 소소한 문제도 다 생각해야 한답니다.)
헬퍼 계약은 2년씩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재계약을 할 때마다 월급을 일정 부분 인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가족과 오래 있었던 헬퍼일수록 월급이 많지요. 하지만 다른 가족에게 고용되는 경우는 다시 최저 임금으로 계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헬퍼가 있으면 뭐가 제일 좋나요?
음, 아무래도 1번은 "몸이 편한 것"입니다. 제가 헬퍼를 고용해 보고 깨달은 건데요, 아이 있는 집이 늘 깨끗하려면 누군가가 하루 종일 두세 번 청소기도 돌리고, 수시로 쓸고 닦고 해야 합니다. (헬퍼 없이도 그런 집을 유지하는 분이 계시다면 경의를 표합니다ㅠㅠ) 작년에 반중 시위로 인해 칩거하고, 올해 코로나 때문에 삼시세끼 해 먹는 상황에서 헬퍼가 없었다면 저는 아마 진작 파업했을 거예요. (쭈글)
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맘들에게 헬퍼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뿐만 아니라, 양가 조부모님이나 친인척 없이 지내야 하는 해외 생활을 할 때 헬퍼는 큰 도움이 됩니다. 급하게 일처리를 하거나 아이가 아플 때, 어른 일손이 하나 더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요. 특히 홍콩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직업 특성상 출장이 잦은 경우가 많은데, 이때 헬퍼의 존재는 더욱 고마워요.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고 정서적으로도 그런데요, 엄마라는 직업은 논스톱으로 종일 아이와 부딪쳐야 하는데 (특히 코로나 시대에는요) 다만 5분, 10분이라도 아이를 두고 혼자 숨 돌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 중 하나입니다.
끝으로 홍콩에 처음 왔을 때 느낀 점인데, 특히 독거노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본인이나 자녀들이 어느 정도의 재산은 있어야 가능한 것이겠지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내내 돌보아 주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 같아요. 거리를 걷다 보면 헬퍼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부축해서 공원 산책도 하고, 휠체어에 태워 장을 보러 가며 말동무도 해 드리고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오랜 시간 함께 해서 진짜 가족처럼 지내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노인을 돌보는 헬퍼(이미지: ejinsight.com)
헬퍼가 있을 때 단점도 있나요?
아, 매우 많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을 빌려 말해 보자면, 헬퍼를 맘에 들어하는 고용주들은 모두 비슷한 이유를 들지만,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각양각색입니다. 제가 건너 건너 들은 것만 해도, 게으르고 손버릇이 나쁜 헬퍼나 아이에게 퉁명스러운 헬퍼부터, 가족을 보러 본국에 휴가 갔다가 임신을 해온 경우(이런 경우 홍콩 법은 헬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어서 고용주가 의료비 전반을 부담해야 합니다), 고용주 몰래 빚을 져서 빚쟁이들이 고용주 집을 찾아오는 경우, 한국에 데려갔는데 야반도주해서(!) 자취를 감추는 경우 등등 별 일이 다 있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은 정말 케바케, 사바사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헬퍼 제도'에서 오는 일반적인 단점을 생각해 보려 해요.
제일 큰 단점은 '불편함'입니다. (1번 장점이 '편함'이었는데, 하하.) 어쨌든 생판 남과, 그것도 외국인과 생활을 같이 해야 하니까요. 고용주는 고용주대로, 헬퍼는 헬퍼대로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샤워 시간, 식사 시간, 생활 습관 등 하나하나 다 맞춰 나가야 하니까요. 특히 헬퍼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직장 상사와 하루 종일 부딪치고 그 집에서 살기까지 해야 하니, 참 쉽지 않을 듯합니다. 일요일에 아무리 습하고 더워도 밖으로 나가려는 이유가 이해가 가기도 해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맞춰지는 부분도 생기지만, 몇 년을 고용해도 여전히 안 맞는 부분은 그냥 감내하고 지내야 하는 듯합니다.
헬퍼의 인권 문제도 항상 등장하는 이슈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헬퍼는 고용주의 집에서 거주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요, 홍콩의 집은 좁기로 악명이 높지요. 저희 가족은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현지 기준으로 제법 크고 고급스러운(?) 아파트에 사는데요, 그런데도 처음 이사 왔을 때 방을 보고는 너무 좁아서 '헉'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이보다 좁은 집에서는 헬퍼와 함께 거주하는 것이 참 어려울 거예요. 헬퍼 방이 따로 있는 아파트들이 많이 있는데, 그조차 싱글 매트리스도 들어가지 않는 아주 아주 작은 공간이거든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것처럼 욕조 안, 세탁기 위, 또는 식탁 아래에서(!) 자는 헬퍼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어요.
매체에 등장한 헬퍼의 공간(이미지: Coconuts.co)
일요일에 무리를 지어 거리에서 지내는 모습을 보면 위생 문제도 걱정이 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 때 헬퍼들이 홍콩에 처음 와서 고용주를 찾기 전 임시 거주하는 숙소에서도 집단 감염이 일어났는데, 아무래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거죠. 그렇다고 일주일에 하루 있는 그녀들의 자유를 뺏을 수도 없고... 이 때문에 일요일에 어차피 비어 있는 공립학교들을 개방해서 헬퍼들의 휴일 아지트(?)로 삼게 해 주자는 의견도 나왔더라고요 [1].
공공장소 모임 금지에도 불구하고 휴일에 길에서 쉬고 있는 헬퍼 무리(이미지: SCMP)
끝으로, 간혹 헬퍼들이 아이들을 키우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학대의 문제도 가끔 등장하지만, 그건 부모나 혈육이 키워도 마찬가지니 제외할게요.) 실제로 헬퍼들이 아이들을 제대로 훈육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렵기는 합니다. 직장 상사의 아이에게 정색을 하며 혼을 내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괜한 오해를 샀다가 고용이 위태로워지는 리스크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주변에서 보면 헬퍼들도 아이를 정성껏 보살피면서도, 아이가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타이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아이의 독립성 저하가 더 큰 문제라고 봐요. 자기가 엉망으로 만든 집도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우렁각시 같은 존재가 집에 있으니, 스스로 뒷정리를 할 유인이 없는 거죠. 실제로 다 큰 십 대 아이들도 가방을 헬퍼에게 들게 시키기도 하고, 충분히 큰 아이도 스스로 신발끈 하나 묶지 못하는(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지에서는 이렇게 스스로 하려고 들지 않는 아이들을 Kong Kids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이 부분은 부모가 헬퍼와 육아의 원칙에 대해 상의하고 소통해야 하는 문제겠지요.
스스로 하기보다는 헬퍼의 도움을 기대하는 Kong Kids의 문제(이미지: Ki Ki Ma 블로그)
동정보다는 존중을
이 곳에는 자기 아이를 본국에 남겨두고 여기 와서 남의 아이를 키우는 헬퍼들이 참 많습니다. 제 친구가 6년 간 고용했던 헬퍼의 경우, 막내가 돌이 되기 전 필리핀을 떠나서 내내 고용주 집 아이를 키웠다고 해요. 자기 아이보다도 직장 상사의 아이를 더 많이 보살핀 셈이죠. 초반에는 두고 온 아기가 보고 싶어 밤마다 울었다고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미어졌을지 상상이 갑니다. 얼마 전 다른 고용주 집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제가 그 헬퍼에게 작별 인사를 하니 아이와도 정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 일은 일이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저희 집 헬퍼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인데, 능력 없던 남편은 진작에 떠나 버렸고 네 자녀와 손주들의 생계를 대부분 책임지고 있습니다. 여동생도, 사촌들도 싱가포르와 중동에 뿔뿔이 흩어져서 헬퍼로 일하고 있고요. 처음에는 안 됐다고 생각했지만, 물가를 따져 보면 여기서 버는 돈이 그들에게는 아주 큰돈이라고 하더군요. 먹여 살릴 가족이 없는 싱글 헬퍼들의 경우 여기서 돈을 벌어서 필리핀에서 집을 몇 채씩 사서 부자가 되기도 한다고 해요. 본국에서 교사나 조산사 등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도 헬퍼로 일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그만큼 경제적 인센티브가 있는 듯합니다.
그들의 운명이 안 됐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열심히 일해주는 그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헬퍼를 마음에 들어하는 고용주나, 자기 일에 만족하는 헬퍼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고맙다는 말을 늘 하는 것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