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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Feb 09. 2022

20평 -> 50평, 평수를 점프한 소감

홍콩에서 달마다 꼬박꼬박 500만 원을 내고 살던 우리 집은 20평 남짓했다. (전에 쓴 글에서도 재차 강조했지만, 현지 기준 정말 좋은 집이었다.)


말이 20평이지, 구조가 잘 빠진 한국의 20평대 아파트를 생각하면 안 된다. 그 평수에 침실 셋과 화장실 둘, 발코니, 부엌에 딸린 헬퍼 방까지 있는 구조였다. 안방을 제외한 침실은 싱글베드가 들어가면 두어 뼘밖에 공간이 남지 않고, 붙박이장에는 일반적인 옷을 걸어도 깊이가 부족해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그래도 성격이 원래 긍정왕인 나는 그 집을 좋아했다. 좁기는 해도 수납공간이 구석구석 잘 갖춰져 있어, 한 번 익숙해지니 세 식구가 충분히 살 만했다. 정북향이라 해가 들진 않았지만 탁 트인 오션뷰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고, 편리한 클럽하우스며 주변 산책로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둘째가 태어나자 그런 나조차도 공간이 몹시 고파지기 시작했다. 아기 자체는 조그맣지만, 신생아에 수반되는 수많은 물품들ㅡ기저귀와 물티슈, 수유 쿠션, 아기 침대와 역류방지 쿠션 등등ㅡ이 안 그래도 좁다란 집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기 침대는 예전에 미국에서 봤던 제품을 중고로 구입했는데, 그때는 그리 커 보이지 않던 것이 어찌나 거대하던지. 방문이 좁아 들어가지 않아 분해해서 들여온 후 다시 조립해야 했다. 짐이 늘자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어쩔 수 없이 아기 침대를 방에서 빼서 거실 한쪽에 놓았는데, 그로 인해 거실은 공식적으로 발 디딜 틈이 없어져 버렸다.


이사를 도우러 홍콩 집에 오신 친정 엄마는 집에 현관이 없는 것이 못내 이상하신 모양이었다. 거실 한 구석을 현관 용도로 내어주기엔 아까워서, 우리는 늘 현관문 밖에서 신발을 벗고 바로 그걸 신발장 안에 집어넣곤 했기 때문이다. 바지런한 헬퍼 아주머니가 나와 함께 하루 종일 집안을 정리 정돈했지만, 그걸로도 모자라 나는 늘 첫째 아이에게 잔소리를 했다. "장난감 다 가지고 놀았으면 집어넣으라고 했지?" "옷 벗었으면 바로바로 빨래 바구니에 넣어 줘."


  


한국행이 결정되고 나서, 시부모님께서 외국에 있는 우리 대신 집을 봐주신 덕에 좋은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지방인 데다 도심이 아닌 유달리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어, 아주 널찍한 집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방이 한 개 더 생기는 것에 불과했지만, 방 크기를 보니 홍콩 집 방 셋에 들어가는 짐을 몽땅 넣어도 될 것 같아 보였다. 그간 사랑해 마지않은 홍콩이었기에 떠난다는 것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사진으로만 봐도 큼직한 거실과 주방에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면 네 방에 침대와 책상, 옷장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어!" 

아이는 믿기지 않는 듯 "정말?" 하며 연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게다가 바선생님들까지 나의 미련을 떼 주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원래 홍콩 집치고는 드물게 바퀴벌레가 안 나오는 (아마 나오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띄지 않는) 집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이사 두세 달 전부터 매일매일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확실했다. 집 안 어딘가에 알을 깐 것.


신생아를 먹이느라 거의 꼬박 지새우던 어느 날 밤. 칭얼대던 아기가 드디어 잠이 들어서 나도 잠을 청하려는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새하얀 천장을 아이스링크 삼아 우아하게 미끄러져 가는 바퀴벌레 한 마리를. 쟤를 잡으면 머리 위로 떨어지려나. 벽을 타고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 녀석은 사라져 버렸지만, 곧 벽에 붙은 다른 녀석 때문에 내 신경은 온통 분산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기를 안아 드는데 침대 이불 위를 쏜살같이 질주하는 또 다른 바선생을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뜰 때가 됐구나.”



그러다 한 달 전. 마침내 나는 고대하던 이 집에 입성했다. 가구마저 없으니 더 커 보이는 집. 홍콩에서 친하던 언니에게 사진을 보여 주니 언니가 말한다.

야, 축하해! 빈 벽이 있어ㅠㅠ

그렇다. 우리에겐 빈 벽이란 사치였던 것이다.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서랍장으로, 키큰장으로 꽉꽉 메워오던 우리였다. 사방으로 온통 하얗게 쭉 뻗은 벽들을 보는 순간 나는 그 공간이 주는 가능성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우리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구와 가전을 장만하고 집을 조금씩 채워 나가다 보니, 자가는 아니지만 제법 '우리 집' 같아졌다. 첫째는 뛰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을 해도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깡충깡충 집 안을 돌아다녔다. 우리가 아이에게 물었다. "아들아, 우리 집이 예전보다 몇 배나 커진 것 같아?" 아이는 한참 고민하더니 답했다. "열 배?" 엄마 아빠가 마주 보고 웃는 걸 본 아이는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열 배보다도 넘게!"


예전에는 뭔가 하나를 사려면 원래 있던 물건을 한 가지 이상 버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걱정 없이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조금이라도 어질러지면 너무 정신이 없기에 늘 치우는 데 급급했던 스트레스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거실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거대한 아기 침대는 이제 안방 한 구석에 소심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살림살이의 크기도 워낙 작아서, 작은 세탁기에 들어가지 않는 이불 빨래를 하려고 매번 세탁소에 가던 것도, 냉동실의 크기를 고려해서 냉동식품을 충분히 쟁여 놓지 못하던 것도 이제 옛날 일이다. 공간이 갑자기 이만큼이나 확장되니 라이프스타일과 마음의 여유도 근본적으로 바뀐 듯하다. 



그러고 보면 집이라는 공간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면서도 우리의 삶에 가장 근원적인 영향을 주는 곳인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이는 것이 빼곡히 가득 찬 옷장인지 휑뎅그레한 빈 벽면인지(아니면 천장을 가로지르는 바퀴벌레인지)에 따라 그날의 생활 모습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ㅡ뭔가를 발견하건, 뭔가를 만들건, 또는 뭔가를 놓고 피 터지게 싸우건 간에ㅡ이런저런 방식으로 결국 누군가의 집에서 끝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전쟁, 기근, 산업혁명, 계몽주의 등등. 이 모두는 누군가의 소파와 서랍장 속에 들어 있었으며, 누군가의 커튼 주름 속에, 누군가의 베개의 푹신한 부드러움 속에, 누군가의 벽에 칠해진 페인트 속에, 누군가의 배관을 따라서 흐르는 물속에 들어 있었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p.14-15)


그러나 결코 "공간이 여유로우면 더 행복하다"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넓은 평수의 집을 처분하고 스스로 원룸으로 이사해 미니멀 라이프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명제는 너무도 단순하며 옳지도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홍콩의 좁은 우리 아파트가 그립다. 그 집 자체가 그립다기보다 그 집에 살았던 우리의 삶과 그 맥락이 그립다. 집안은 복닥복닥하지만 습한 바닷바람이 스며들고, 실내가 답답해 밖에 나가면 이국적이고 새로운 재미가 쏟아지던 그곳. 만일 다시 이사를 가야 한다면, 나는 널찍한 이 집과의 작별은 아쉽지만 기꺼이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다. 대신 여기 사는 동안은 이 널찍한 여유를 마음껏 음미하며 하루하루를 감사히 여길 것이다. 어차피 나와 우리 가족이 행복한 곳이라면 집은 어디에 있든, 얼만큼 크든 우리 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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