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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an 24. 2022

입맛이 가출했던 사연

작년 하반기부터 식욕을 잃었다. 


엄청난 대식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식도락을 즐기던 나였다. 딱히 가리는 음식도 없어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아했고, 언제든 붙잡고 물어보면 구수한 일본 라면부터 꾸덕 달콤한 브라우니까지 대여섯 가지는 줄줄 읊을 만큼 먹고 싶은 것도 많았었다. 임신 후반기로 들어서며 입덧도 완전히 끝났고, 무럭무럭 자라는 태아를 위해 더욱 잘 먹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입맛은 가출을 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식욕 부진의 원인은 아무래도 스트레스 아니었나 싶다. 예기치 못하게 터울이 큰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고, 낯선 남의 땅에서 출산을 하게 되었으며, 코로나로 인해 불확실성도 너무나 컸다. 그 뿐인가. 9년 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의 귀국을 앞두고 있었고, 어쩌다 보니 아기가 50일 될까말까할 때에 비행기를 타야 했다. 친정 엄마가 도와 주시러 오시기로 했지만 홍콩에서 2주 호텔 격리를 하셔야 해서, 엄마가 머물 격리 호텔 방을 (치열한 경쟁 속에) 예약하고 그에 맞춰 비행기표를 구매하는 것도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우리가 이사하는 곳은 익숙한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였다.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곳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구한 집에 가구와 가전을 사서 채워 넣어야 했다. 홍콩에서 오는 이삿짐을 받아서 정리해야 했다. 큰 아이를 전학시키고 적응시켜야 했다. 그 모든 것을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해야 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오미크론이라는 거지같은 녀석까지 방해를 했다. 귀국이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백신 접종과 무관하게 열흘 격리가 의무화됐다. 물론 그 상황에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원래 그 시기에 처리하려 했던 산더미 같은 일들이 그대로 열흘 뒤로 미뤄졌기 때문에 스트레스는 배가 됐다. 급한 은행 업무도 처리할 것이 많았고, 태어난 아기에 대한 행정 업무와 큰애 전학 관련해서 할 일들이 많았다. 격리를 할 줄 알았으면 미리 일정을 조정하는 건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게다가 홍콩에서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우리보다 늦게 귀국하게 된 남편도 격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나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잠은 매일 밤 더 먼 곳으로 달아나 버렸고, 아마 그 때 입맛도 함께 데려간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정작 하나 하나 태스크를 클리어하니 내가 누리고 있는 축복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 생명과 남편의 새 직장. 하나만으로도 주변 모두의 축하를 받을 만큼 인생의 반짝거리는 이정표 아닌가. 둘이 동시에 찾아온 것은 좀 정신은 없을지언정 실은 행운이 더블로 찾아온 것이었다. 


게다가 너무도 감사하게도 양가 어른들의 도움도 넘칠 만큼 받았다.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열 배, 스무 배도 넘게 힘들었을 텐데, 우리 식구가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밥상을 다 차려서 떠 먹여 주셨다. 이 도시에 사는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정착할 동네를 고민할 때, 직접 운전하며 영상을 찍어 편집까지 해서 몇 번이나 보내 주고, 오자마자 주변 사람들도 소개시켜 주어서 내가 느끼는 낯섦을 덜어 주었다. 많은 변화에 힘들다고 칭얼거리기에는 나의 잔에 담긴 따뜻한 사랑이 넘치고 넘쳤다. 


50일 된 아기를 안고 귀국한 날, 아빠가 말씀하셨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것이 본질에서 오는 것인지 과정에서 오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후자라면 걱정할 것이 없단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니까.


정말 그랬다. 과정은 다사다난하고 고된 점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더 나은 본질의 변화를 위한 것이었다. 내 나라로 돌아오고, 부모님과 가까워지고, 식구가 한 사람 늘었다는 본질적인 변화는 더 큰 행복만을 가리킬 뿐이었다.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모두 싹 없어진다는 걸 믿고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실제로 무사히 아기를 낳았고, 이삿짐을 싸서 부쳤으며, 갓난아기를 안고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 격리도, 이사도, 그토록 두려워 했던 것보다는 할 만 했다. 아기는 벌써 백 일을 바라보고, 나도 어느덧 정리가 거의 끝난 넓고 조용한 집에서 글을 쓴다. 앞으로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이만큼 왔으니 또 더 못 갈 건 뭔가. 


집 나간 입맛아, 이제 돌아오렴. 달콤하고 짭짤하고 고소하고 매콤한 음식을 마음껏 즐겨 보자.   



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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