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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Feb 14. 2022

어린이 영화를 보고 오열한 이유

어제 큰애와 함께 <토이 스토리 3>를 보았다. 예전에도 분명 본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 부쩍 키가 큰 첫째와 나란히 앉아 함께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는 앤디와 아들이 겹쳐 보였다. 아직은 레고를 하다가 잘 안된다고 짜증을 내며 울고, 자기 전에 내 품을 파고들며 아기 동생만 봐주지 말고 자기도 보살펴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걸 보면 영락없는 꼬마다. 그러나 아이는 작년의, 아니 지난달의 아이와도 부쩍 달라졌다.


이제 친구들과 놀 때는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고, 학교도 혼자 오가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밤에 엄마 곁에서 잠이 들기보다 불을 켜고 만화책을 보며  좀 더 늦게까지 깨어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새 학교로 전학해서 낯설어서 집에 오고 싶기는 했지만 엄마가 '그렇게까지 보고 싶지는 않은' 아이가 되었다.


아이는 이제 만 8살, 한국 나이로는 열 살이다. 키운 만큼만 더 키우면 레고도, 만화책도, 숙제도 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어 있을 거다. 버리지 못하고 모아 놓은 어머니날 카드며 낙서가 가득한 스케치북도 그저 나의 눈물샘만 자극하는 낡은 추억이 되어 있겠지.


그렇게 나는 울음보가 터져 버렸다. 영화에서 앤디가 자기 인형들을 몽땅 이웃 꼬마에게 주는 장면에서, 나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이렇게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아이인데, 뭘 그리 잘못했다고 버럭버럭 혼내가며 키웠을까. 나중에 떠나가게 되면 아이는 한 번쯤 내 얼굴을 뒤돌아 보려나. 눈물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꺽꺽하며 울어버렸다. (함께 영화를 보지 않은 남편은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달래줬지만, 무슨 큰일이 생긴 게 아니고 그저 만화영화 내용에 마음이 아파서 그렇다는 걸 알고 약간 당황했다.)

아이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우는 나를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엄마, 왜 울어?" 나는 아이를 꼭 껴안으며 나중에 네가 크면 엄마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그리울 것 같다고 흐느끼며 말했다. "엄마도 엄마가 된 게 처음이라 잘 못해준 게 많은데, 네가 크면 많이 후회가 될 것 같아. 잘 못해줘서 미안해." 아이는 나를 꼭 마주 안았다. "아냐, 엄마는 좋은 엄마야. 그리고 지금부터 더 잘하면 되지."


그렇게 나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오열해 버렸다.



사실 나는 늘 내가 엄마라는 직업에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들이기에 가슴 저리게 사랑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다 놓치는 것이 솔직히 싫었다. 젊고 자유로울 때 밤늦게까지 실컷 누리던 친구들과의 시간이며, 차곡차곡 쌓던 커리어, 훌쩍 떠나는 여행, 고요히 관람하는 연극 공연까지. 무엇보다 정장을 차려입고 회사에 출근해서 동료들이 있는 공간에서 바쁘게 일을 하는 직장 생활이 가장 그리웠다. 멀리 출장도 가고, 성과가 좋을 때 받는 인정이 고팠다. 아이 친구 엄마가 아닌, 일로 만나는 (예전 같으면 가끔은 지긋지긋하던) 공적인 관계가 아주 많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 내 진짜 삶은 '조금 미뤄두었다'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찾으려 했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마치 집에 틀어박힌 삶이 계속될 것만 같지만, 사실 3-4년 정도만 키워도 엄마에게는 많은 자유가 찾아오니까. 아이가 제 앞가림을 하고 학교를 다니는 나이가 되면, 교육에 대한 걱정은 될지언정 물리적으로 아이에게 완전히 매여 있다는 생각은 사실 들지 않는다. 더 이상 '아이 때문에' 뭔가를 하지 못하는 게 아니니, 조금 미뤄둔 내 삶은 그때 가서 찾으면 되겠지.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자 깨달았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그에 수반되는 수면 부족에, 지루함에, 반복에, 체력 고갈에, 비교와 속상함에 마음을 쓰는 동안, 삶은 바로 그 자리에서 조용히 꽃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보니 삶이란 아이를 다 키우고 찾아오는 자유로운 그 무언가가 아니었다. 아이에게 매여 꼼짝을 못 하는 것 같아 매 순간 인내심을 요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 자체로 가장 화려하고 가장 뜻깊은 성취가 내 삶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일상이라는 틀에 갇혀  내 눈에만 보이지 않았을 뿐.


두 아이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한 채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키우며 이룬 모든 일은 결국 아이들 덕분에 해낼 수 있었다.

- 김민주, <우리가 우리에게 닿기를>, p.214


아이를 키우면서도 항상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써왔던 삶이지만, 오롯이 나를 위한 삶조차도 아이와 완전히 분리할 수도, 분리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줄과 날줄이 얽힌 예쁜 태피스트리처럼, 나와 아이들이 얽힌 삶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그리고 오늘도 보석같은 내 아이들을 위해 '이제부터 더 잘하려' 애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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