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 한 조각.
초등 4학년 때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비교적 좋은 담임 선생님들을 만나 즐겁게 학교 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학년이 바뀌고 고학년이 되어 처음 만난 선생님은 그전까지와는 참 달랐다.
나이는 50세 전후였던 것 같다. 일단 매사에 그다지 의욕이 없었고,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도 한참 걸렸다. 아이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고 어린 마음에도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혼내지 않았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선생님의 눈에 들지도, 그렇다고 미움을 받지도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일단 눈 밖에 나면 꽤나 가혹한 말을 하시곤 했다. 아직도 생각나는 어떤 남자아이는 조금 통통한 편이었는데, 그 아이에게 '게을러서 살이나 피둥피둥 쪘다'면서 비난을 하곤 하셨다. 성격이 무던하고 착한 아이였는데 (이름도 얼굴도 기억난다) 얼굴이 빨개져서 아래만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혼내는 것보다도 더 나쁜 점은 편애가 심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모두 비슷한 동네에 사는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조금 독특하게도 멀리서 등교하는 아이가 있었다. 차로 20-30분 정도 걸리는 신도시에 살던 여자아이. 화려하게 치장한 어머니가 반짝반짝 세차한 차를 끌고 그 아이를 데려다주시고, 또 데리러 오셨었다. 외동딸이었고,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자연스레 요즘 말로 '여왕벌' 같은 아이가 되었는데, 친한 친구가 많다기보다는 대하기 어려운 아이였다. 주변에 두 명 정도 친구들을 데리고 다녔고, 그 아이들은 하교 후 여왕벌의 어머니가 주시는 간식도 먹고,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선생님은 그 아이를 눈에 띄게 편애했다.
수업을 하다가도 그 아이가 선생님께 자연스레 말을 걸기도 했고, 그러면 둘만의 대화가 몇 분이고 이어지곤 했다. 수업과 관계되는 내용도 아니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이야기, 집에 새로 산 물건 이야기 등이 주제였다. 처음에 아이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2학기쯤 되자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자기 멋대로 하는 그 아이에 대한 미움도 상당했다.
나도 참고 참다가 하루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수년이 지나고 엄마의 육아일기를 보았는데, 당시의 일기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무관심과 편애 속에 깊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 엄마가 잘 몰랐음을 자책하고, 나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당시 나는 내가 '상처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 혼자만 당한 일도 아니고, 다른 아이들도 다 함께 느낀 것이기에 오히려 연대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이 학교에서 받은 첫 상처였던 것도 맞는 듯하다. 보호자가 되어야 할 선생님이 그래 주시지 못했으니.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선생님이 그 아이만 예뻐하던 것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수업 시간에 그 아이가 또 끼어들어서 자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그래 알았다'라고 재빨리 끊어버리고 수업을 계속하셨다. 쉬는 시간이나 급식 시간에 그 아이 옆에 계시던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셨다. 아이들은 무언가 달라진 걸 느끼고 수군수군거렸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에 대한 적대감이나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공개 재판을 열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도 그 아이를 피고로 세워놓고.
다들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공개 재판이라니.
선생님은 그 아이 때문에 피해를 보았던 일이 있다면 이 기회에 모두 얘기해 보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쭈뼛쭈뼛 거리던 아이들이 한 명씩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했다. 물론 초등학생들이니, 엄청나게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 기억도 자세히 나지는 않는다. 자기가 마시려고 아껴둔 초코우유를 그 아이가 가져가 버렸다던가, 허락도 받지 않고 샤프를 가져갔다든가 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마디씩 했고, 그 아이는 교실 앞에 나가 그 말을 모두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의 참여를 권장했지만 과도한 비난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도 충분한 발언 기회를 주셨다. "이게 사실이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아이가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주로 "나는 그런 적이 없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라고 답변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차분히 들으시더니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꼭 자기에게 바로 얘기해 달라고, 모두들 고맙다고 하셨다. 그 아이에게도 혼을 내거나 벌을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날 이후, 그 아이는 눈에 띄게 기가 죽었다. 예전처럼 마음대로 굴지도 않았고, 선생님에게 수업 중간에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날 이후 그 아이와 더 자주 얘기하고 조금 친해졌다. 그 아이가 생각보다 콧대가 높고 자기 멋대로인 것만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 친해지진 않았고, 다음 학년이 될 때쯤 그 아이는 전학을 갔다.
그저 오래전 기억이라고만 생각하고 잊고 있었는데, 문득 얼마 전 이 사건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고 보니,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점점 더 완고해질 수도 있는 나이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걸 고치려고 애쓴 어른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공개 재판'이라는 가혹한 말로 교단 앞에 세웠던 게 과연 잘한 행동이었을지 의문도 든다. 아직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는데 말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는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의 괴롭힘이 생각보다 심했을 수 있고, 상처를 입은 다른 아이들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위로해 준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선생님이 편애를 인정하고 사과를 하고, 더 이상 그 아이가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제재하는 것이 더 좋은 방안 아니었을까.
선생님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신 걸까. 누군가 말을 해주었던 걸까?
모든 사건은 다 자기 눈으로만 보는 법이기에 과연 내가 기억하는 디테일들이 맞는지도 확신이 없다. 그래도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모두가 평안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