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오링고 1847일 차

사소한 꾸준함에 대하여

by Hoon

'듀오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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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부엉이와 함께 언어를 배우는 앱이다. 요즘은 TV에서 광고가 나올 만큼 유명해졌던데, 사실 나는 이 앱과 함께 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7년. 홍콩으로의 이사를 앞두고 있을 시점이었다.


당시 첫째는 홍콩 내 국제학교로 전학을 갈 예정이었고, 우리는 아이의 적응을 위해 홍콩의 국제학교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기에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에게 큰 문제는 안 될 것 같았지만, 문제는 중국어. 홍콩에서는 광둥어를 쓰지만 학교에서는 북경어를 가르친다. (그래서 홍콩 로컬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광둥어, 북경어, 영어의 3개 국어를 기본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아이도 홍콩에 간다면 북경어를 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숙제라도 받아 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야 할 텐데. 아니, 도와주진 못해도 대충 뭘 해야 하는지라도 알아야 할 텐데. 이런 생각에 나는 듀오링고 앱을 다운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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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듀오링고는 영어 사용자가 기타 언어를 배우는 방식이었기에 앱 세팅은 영어로 되어 있었다. 또, 예전에 중국어를 잘하시던 분에게 영어<->중국어 호환이 좋단 얘길 들은 적이 있어서 영어 기반으로 중국어를 배우는 방식이 괜찮으리라 생각했었다.


중국어라고는 '니하오'밖에 몰랐던 내가 (심지어 니하오에 해당하는 한자는 당연히 몰랐고, 중국어에서 쓰는 한자가 한국에서 익숙한 한자들과 상당히 다르단 것도 전혀 몰랐다) 중국어의 세상으로 뛰어든 순간이었다. 알파벳으로 발음을 표시한 '핑인'도 그때서야 처음 접했고, 어렴풋이 알았던 성조도 초록 부엉이가 모두 가르쳐 주었다.


매일 5분씩이라도 무언가 한다는 건 하루만 떼 놓고 보았을 때 지극히 사소하지만, 매일 꾸준히 한단 건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요한다. 언어 공부를 좋아하는 내게 중국어는 처음에는 꽤나 재미있고 신기했지만, 점점 진행되자 금방 지루해지기도 했다. 한자는 끝도 없이 많았고, 성조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내가 실제로 발화할 수 없는 언어란 것이 큰 문제였다. (당시에는 듀오링고에 스피킹 기능도 없었다.)


홍콩에 도착해 북경어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의 진도는 내가 몇 달간 5분씩 배운 중국어 진도를 며칠 만에 뛰어넘었고, 아이의 언어 습득을 돕겠단 나의 야심 찬 꿈은 바사삭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미 세 자릿수를 넘어간 'streak' (연속 xxx일) 때문일까, 당장 그만두진 않고 하루 오 분쯤을 앱에 할애하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몇 년 후에는 정말 중국어를 해야 하는 의미가 사라져 갔고, 그때 진지하게 듀오링고 앱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듀오링고 앱을 하지 않는 그 5분이 보나 마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쓸데없는 일로 채워질 게 뻔하단 생각이 들었다. 듀오링고는 5분이라도 생산적인 무언가를 한다는 '보장'이 되니까.


그래서 프랑스어로 갈아탔다. ㅋㅋ


DELF 자격증을 땄을 만큼 20대에 열심히 공부했었지만, 십 년 넘게 묵혀두었던 언어다. 소리가 아름답고 막연하게 멋진 것 같아서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이 여럿 망쳤다) 대학교에서 수업도 듣고 알리앙스 프랑세즈도 다녔었다. 꽤나 열심히 하던 언어였지만 역시나 발화가 되지 않아 (...) 그만둔 지 한참 되었던 시점이다. 그러나 하루 5분인데 한 번 들여다볼까,라는 생각에 듀오링고 메인 화면에 프랑스 삼색기를 추가했다. (le Bleu, Blanc, Rou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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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2주 정도 일본어도 해 보았지만, 결국 히라가나에서 막혀 포기했다. 어른의 뇌가 되어서일까, 왜 이렇게 외우기가 어려운 건지. 결국 일본어는 '스시 すし'만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거면 됐다) 다시 씁쓸하게 프랑스어로 복귀.


물론 단 하루도 안 빼먹은 건 아니다. 듀오링고에는 고맙게도 'streak freeze'라는 기능이 있어서, 못 하는 날은 이걸 사용하면 된다. 까먹고 안 하면 저절로 사용된다. (어제도 까먹고 못함 ㅠㅠ) 휴가 기간 동안 인터넷 접속을 못해서 4일 정도 못한 적도 있는데, 그때도 듀오가 고맙게도 장기 학습자의 사정을 봐준 건지 streak이 유지되었다. 그래서 숫자는 2000에 가깝지만, 이제껏 못 한 날을 다 합치면 분명 한 달 이상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아이들을 재운 밤, 나는 홀로 부엌에 앉아 늘 초록 부엉이를 클릭한다. 5분의 시간,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프랑스어. 초록 부엉이의 응원을 받으며 공부하는 말하지도 못하는 외국어. 실력이 는다는 느낌보다 한 마디라도 귀에 발라(?) 감각을 유지라도 하려는 나의 고달픈 노력. 그래도 멍하니 숏츠를 보는 것보다는 생산적인 5분이리라.



사실 AI가 득세하는 세상에 외국어를 배우는 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제는 실시간으로 생판 모르는 외국어도 자연스러운 모국어로 바꾸어 주는 세상인데. 굳이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 번역도, 통역도, 점점 수요가 줄어들기만 하는데.


그럼에도 하루 시간 중 0.3퍼센트를 여전히 할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1800일 차를 넘어 2000일 차로 가고 있는 숫자놀음일까.


아니, 차라리 '태도'의 문제일지 모른다.


외국어 학습은 수단일 뿐, 사소할지라도 꾸준하게 오 분을 할애한단 것. 그 성실함을 배운다는 것. 단지 그것이 이유일지 모른다. 티끌 모아 티끌일지라도, 결과에 관계없이 그 티끌을 모으는 구부정한 자세를 내 몸에 익히려고.


일상. (...) 거기 함정이 숨어 있다. 똑같이 반복되는 듯 보여도 그 이면에는 야금야금 뭔가가 진행되고 조금씩 쌓여간다.
그렇다, 그 흰 깃털처럼.

- 온다 리쿠, <잿빛 극장>, p. 264


듀오링고만은 아니다. 잡일을 도맡아 하는 인턴으로 시작한 회사 일도 십수 년이 쌓였다. 몇 년째 말이 잘 통하는 벗들과 함께 하는 시 필사도, 한 달에 한 번 모여 수다를 떠는 책모임도, 그리고 틈만 나면 의자에 앉아 넘기는 책장도 나의 매일을 구성한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또 그것이 수년 모인다 해도 그리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지만, 내게는 의식(ritual)에 가까운 행위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리라. 일주일에 한 번 식물에 물을 주고, 비가 와도 반려동물과 매일 산책을 나가는 것. 아이들을 뒷전에 두고 누워 있고만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웃는 얼굴로 아침밥을 차려주는 것. 단 오 분의 시간이라도 참고 인내하는 그 경험의 누적이 인생을 바꾼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켠다. 듀오링고 앱을. Duo, ça va b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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