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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Feb 26. 2021

집에 있는 엄마, 일하는 엄마

우리 엄마는 결혼 후 17년 간 집에서 살림을 하셨다.


그러다가 언니가 고 2, 내가 중 2가 되던 해, 공부를 다시 시작하셨다. 남들은 직장을 다니다가도 아이들 교육 때문에 그만둘 시기라고들 했다. 그렇지만 엄마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라는 듯, 원래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로 대학원 석사 과정을 시작하셨다. 우리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을 청소하는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잠깐의 짬이 나면 즉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논문을 읽으셨다. 그렇게 박사까지 졸업한 엄마는 아직까지 현역. 프리랜서로 일을 하신다.


엄마가 17년 간 가정주부였던 건 꼭 그래야만 했던 건 아니었다. 사대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수료한 엄마는 얼마든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 둘의 엄마로서의 삶을 먼저 택했다. 여러 형제자매들이 모두 잘 나가는 커리어를 추구하는 동안, 엄마는 묵묵히 엄마로의 삶을 지켰다. 나중에 들으니 엄마의 친정에 가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러나 철없는 막내딸은 엄마 속도 모르고 집에 늘 있는 엄마를 당연하게 여겼다. 아주 가끔 외출이라도 하려고 튤립이 그려진 실내복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면 "엄마, 어디 나가? 나가지 마."라며 퉁퉁거렸다.

 

하지만 17년의 세월은 엄마에게는 겨울철 흙 속에 파묻힌 씨앗과 같았다. 꼭 그래야만 했던 건 아니지만 우리를 최우선으로 삼아준 것처럼, 엄마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 친정에는 지금도 수십 년 동안 간직한 옛날 책들이 있는데, 엄마가 일일이 어려운 단어를 번역해 메모해 놓은 영어책들도 많다.  어쩐지, 내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엄마에게 어렵고 신기한 영어 단어를 말해 주면 엄마는 항상 이미 알고 있었다. 마치 손때 묻은 백과사전처럼, 엄마의 시간에는 언제나 공부가 차곡차곡 묻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소위 말하는 "전업맘"이 "직장맘"과 반대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욕심을 누르고 우리를 먼저 키운 엄마 손에서 자랐다 보니, 게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바람항상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아이가 생기기 전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조급함도 있었다. 나는 여자로서 드물뿐더러 도통 성향과는 맞지 않은 전기공학부를 나왔는데 (실수였다), 방황 끝에 전혀 다른 꿈을 좇다가 몇 년 정도 커리어 공백이 있었다. 그래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며 미국에 갔을 때, 나는 어떻게든 일을 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유학생 아내로 아무것도 안 하기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석사 과정을 지원하기는 했지만 남편과 같은 학교는 똑 떨어져 버렸고, 그 와중에 예기치 못하게 임신까지 한 상태였다.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되는 것이 우선인데 내 커리어는 어쩌나, 덜컥 겁부터 났다. 하지만 "아기가 나오기 전에라도 뭐든 해 보자"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구직 사이트란 사이트는 모조리 뒤져 닥치는 대로 연락을 하고, 진입 장벽이 낮은 비영리기관에서 일단 일을 하기로 했다. 보수를 받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원래 내가 한국에서 일하던 분야라서 경력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활발히 일을 하는 와중에 동네 스타트업에서 인턴을 구하는 걸 알게 되었다. 전화 인터뷰를 보고, 면접을 보고, 간단한 시험까지 쳐서 돈을 받고 일하는 파트타임 자리를 얻게 되었다. 결국 두 자리를 합치면 풀타임만큼이나 바쁘게 (심지어 주말에는 대학교 미술관에서 안내 봉사까지 했다) 살 수 있었다.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 겁내지 않고 부딪쳤던 용기 덕에 나는 지금까지 인턴을 했던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원거리로 남들의 절반만 일하니 돈을 특별히 많이 버는 것도, 근사한 나만의 사무실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일할 수 있어서 좋다. 이건 나만의 영역니까. 편으로는 풀타임 커리어 대신 아이의 축구 교실을 따라다니고, 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줄 수 있는 것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전히 눈을 떴을 때 아이를 돌보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있어서 좋다.


꼭 업무를 말하는 건 아니다. 공부를 하든, 책을 읽든, 글을 쓰든, 꿈을 꾸든. 나는 "할 일이 있는 엄마"가 되고 싶고, 나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엄마들이 좋다. 코로나로 인해 너무도 달라진 세상에서, 집에 머물면서도 나를 드러내는 플랫폼이 많아졌다. 이런 세상에서 "할 일이 있는 엄마"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더 많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작년에 다글다글 복작거리는 단톡 방에 합류하게 되었다. 대부분 해외에 거주하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모임이다. 일을 하시는 분도 있고 아닌 분들도 있지만, 모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무엇보다도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처럼, 형형색색의 깊고 환상적인 세계는 가끔 서로 겹치고 가끔 서로를 찾아간다. 나는 브런치를 처음 시작한 다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쓴다는 사실에 적잖은 위안을 받았었다. 마찬가지로 이 단톡 방에 들어간 다음 나는 외롭지 않다. "엄마로서의 나"의 삶에서 "나로서의 나"는 가끔 흐릿해지지만,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건 정말 소중한 일이다. 리 친정 엄마처럼, 단톡 방 벗들처럼, 단단히 자신의 중심을 지키려 하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 표지 이미지: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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