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난 더 어른이니, 나보다는 용기 있겠지
책을 읽는데 문득,
방금 읽었던 문장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글자를 읽는 행간마다 나의 뒤엉킨 상념들이, 실뭉치처럼 어지럽게 글자의 사이를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집중이 안 되는 게 역시 SNS의 폐해인가, 유튜브 쇼츠 때문에 나도 도파민에 뇌가 절여진 거야.
이렇게 단순한 설명으로 끝내려 했으나 찝찝함이 올라왔다.
이런 날은 분명 걱정거리가 많은 날이다.
걱정이 많은 날에는, 이런 놈들이 귀신 같이 불쑥 끼어들어 구시렁 거린다.
“내가 지금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지금은 바빠. 그런 거 신경 쓸 시간 없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신경이 간다.
무심한 척 한 것이 적잖이 민망스럽다.
'내가 몰라서 그런 줄 아나?'
'나도 나중에 생각해보려고 했다고'
미룬다고 미뤄지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이 딱 그런 것이다.
어릴 적부터 다른 건 잘만 미뤘는데, 걱정은 미뤄지지가 않는다.
걱정에 있어서 만큼은 어쩌면 난 누구보다도 근면성실한 사람이라고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듯싶다.
이럴 때마다 가끔 뭔가를 끄적거렸다.
그런다고 딱히 문제가 해결이 되는 건 아닌데, 마음을 풀어주니까 자리를 잡고 앉는 거다.
그렇게 마음을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와 마주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사실은 감당할 수 있는 것들도 한꺼번에 몰려들어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무언가가 우르르 밀려오는 것 같지만, 불을 켜보면 의외로 별것 아닐 수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 순간에는 불을 켜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냥 거대한 덩어리가 몰려와서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로 큰 문제인지, 아니면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인지조차 분간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걱정이라는 것은 원래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것인데, 불안이 커지면 그 경계가 흐려진다.
각각 따로 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도, 흐릿한 실루엣으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이걸 다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는, 하나를 해결하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진다.
이런 이야기를 상담실에서 하면, “그럼 어떻게 해요?”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일단, 불을 켜보자.”
걱정을 나누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글로 적어도 좋고, 말로 꺼내도 좋다. 머릿속에서만 맴돌게 두면 계속 섞이고 뒤엉켜서 더 커 보이지만, 밖으로 꺼내 놓으면 형태가 잡힌다. 그리고 그제야 ‘이건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것이고, 저건 혼자 과하게 생각했던 것이구나’ 하는 식으로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이게 상담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중압감이라는 것은, 실제 문제의 크기보다도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인식하는 상태에서 더 크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너무 벅차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일단 한 걸음 물러나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가 정말 이렇게 거대한 것인지, 아니면 흐릿한 윤곽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떼어놓고 바라볼 수 있다면, 압도당하는 순간에도 적어도 방향은 보일 것이다.
그게, 문제와 마주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첫 번째 단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