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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원한다"

프로이트의 "죽음 본능"

우리는 죽음을 ‘영면(永眠)’이라고 부른다.

영원한 잠. 단지 시적인 표현일 뿐일까?

사실 이 말은 죽음과 잠, 그리고 이완이 구조적으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잠은 감각이 닫히고, 자아가 사라지며, 세계와의 관계가 해체되는 상태다.

이완도 마찬가지다. 몸의 긴장이 풀리고, 정신은 느슨해지고, 경계는 희미해진다.

그리고 그 이완의 극단이자 지속된 상태가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왜 이완을 갈망하는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완을 갈망한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

더 편한 자세, 더 안정된 관계, 더 예측 가능한 일상을 원한다.


이 모든 바람은 ‘움직이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긴장을 내려놓고자 하는 존재적 욕망에서 비롯된다.


쾌락 역시 마찬가지다.

쾌락은 흔히 강렬한 자극으로 이해되지만,

실상 그것은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에만 발생하는 이완의 감각이다.

목이 마른 상태에서 마시는 물, 긴 하루 끝에 누워 한숨 돌리는 순간.

혹은 억울함 끝에 명쾌하게 정의가 실현되는 장면.


이 모두는 해소를 통해 주어지는 쾌락이다.


고구마, 마라톤, 노동 후 식사


이런 구조는 이야기 속에서도 반복된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았습니다”
는 이야기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반면,


“주인공은 억울하게 몰리고, 고통을 겪었지만 결국 모든 걸 극복하고 회복되었다”
는 이야기에는 고구마 먹은 뒤 사이다 마시는 듯한 쾌감이 있다.


긴장이 쌓인 만큼, 이완은 깊고 쾌락은 강렬하다.

이완 없는 긴장은 고통이지만, 긴장 없는 이완은 무의미하다.


42.195km 마라톤도 같다.

고통이 누적되지만 완주의 순간, 말로 환원할 수 없는 해방과 전율이 찾아온다.

그건 단순한 성취감이 아니라,

깊은 긴장 속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정제된 이완의 순간이다.


노동 후의 식사도 마찬가지다.

땀 흘린 뒤 먹는 밥 한 끼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노동을 통과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이완의 감각이다.


이완의 끝은 죽음이다


이러한 구조는 프로이트의 ‘죽음 본능(Thanatos)’과도 맞닿아 있다.

죽음 본능은 자살 충동이 아니라,

모든 긴장과 분리, 의미작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의 에너지 흐름이다.


삶이란 에너지의 확장이고,

죽음은 그 흐름이 멈추는 지점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긴장을 품지만,

그 긴장은 언제나 이완을 지향하며,

그 이완은 종국에 죽음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완은 끝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역설이 있다.

우리는 이완을 갈망하지만,

이완이 충분해지면 다시 긴장을 갈망한다.


쉼을 얻으면 정적은 곧 지루함이 되고,

그 지루함은 다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충동으로 바뀐다.


우리는 다시 일터로, 관계로, 움직임 속으로 돌아간다.

이완은 끝이 아니라, 다음 긴장을 잉태하는 시작이다.


삶과 죽음, 긴장과 이완은 일직선이 아니라

진자 운동처럼 순환하는 구조 속에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해 긴장하고,
살만해지면 이완을 추구하고,
이완이 충분해지면 다시 의미를 갈망한다.


죽음을 닮아가는 우리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매일같이 죽음과 닮은 이완의 상태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잠들고, 가만히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그 속에 우리는 죽음을 연습하고, 삶을 다시 준비한다.


삶은 긴장의 연속이지만,
죽음은 가장 깊은 이완이다.


그리고 그 이완을 반복해서 갈망하는 우리 안에는

단지 피로한 신체가 아닌,

존재 자체를 사유하려는 자각적 의식이 깃들어 있다.


존재의 진실


우리는 단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죽음을 되묻고,

죽음을 사유하며 다시 살아가려는 존재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피하면서도 매일같이 닮아가는 우리,

철학적 인간의 본질적인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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