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의 싸움에서 졌다면, 이긴 것도 나 자신이다
알람이 울린다. 5분만 더. 다시 울린다. 10분만 더. 결국 한 시간 뒤에나 몸을 일으킨 아침, 어김없이 자책감이 밀려온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어젯밤 야심 차게 세웠던 계획은 첫날부터 무너지고, ‘의지박약’이라는 선명한 낙인이 이마에 찍히는 듯하다.
이처럼 우리 대부분은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한 싸움을 매일 치른다. 부지런한 나와 게으른 나, 계획적인 나와 즉흥적인 나, 이성적인 나와 감성적인 나. 그 싸움에서 졌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패배감에 젖는다.
그런데 만약, 이 지긋지긋한 내면의 전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면, 이긴 것도 내 자신이다."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그럴듯한 핑계로 실패를 정당화하는 가장 세련된 방법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 말이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문장의 속뜻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자기합리화’와 ‘자기수용’은 쌍둥이처럼 닮아 보이지만, 그 속내는 정반대다. 자기합리화의 목표는 명확하다. 실패했다는 죄책감, 무능하다는 무력감 같은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든 피하는 것이다. “오늘 너무 피곤했으니까 운동을 쉰 건 당연해. 이건 퇴보가 아니라 현명한 휴식이야.” 이렇게 스스로를 속여 넘기며 마음의 평화를 ‘임시’로 얻는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대로 남기에, 우리는 내일 또다시 같은 싸움터에 서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이긴 것도 내 자신이다”라는 말 속에 숨은 ‘자기수용’은, 불편한 감정을 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나에게 실망하는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다. 대신, 그 싸움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계획적인 나’를 이기고 잠을 선택한 ‘게으른 나’는 정말 없애야만 하는 적이었을까? 혹시 그는 ‘성실’이라는 가치에 짓눌려 있던 내 몸이 보내는 처절한 ‘휴식’의 신호는 아니었을까? 다이어트를 포기하고 야식을 선택한 ‘의지박약인 나’는, 사실 하루 종일 감정노동에 시달린 내 마음이 간절히 원했던 ‘따뜻한 위로’의 다른 모습은 아니었을까?
이 관점에서 ‘패배’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애써 무시해왔던 또 다른 나의 목소리가,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와 자신의 필요를 알리는 ‘소중한 신호’가 된다. 계획을 세우던 ‘이상적인 나’도 나고, 그 계획을 무너뜨리며 휴식을 원했던 ‘현실의 나’도 나다. 이 둘은 적이 아니라, 나라는 한 존재를 구성하는 동등한 동료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안의 전쟁은 다른 국면을 맞는다. 한쪽을 억지로 굴복시키는 싸움은 멈추고, 두 목소리 사이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래, 계획을 지키지 못해 속상하구나. 인정해.” “하지만 그만큼 너에게는 휴식이 절실했구나. 그것도 알아줄게.”
이 대화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매일 한 시간 운동이 버거웠다면, 주 3회 30분으로 조절할 수 있다. 매일의 독서가 부담이었다면, 주말에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책에 푹 빠지는 시간을 선물할 수도 있다. 이는 패배가 아닌, 내 안의 다양한 욕구들을 조율해나가는 ‘성숙한 협상’이다.
‘내가 나에게 졌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것은 괴롭다. 하지만 그 승리한 주체 역시 ‘나’라는 사실을 끌어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의 가장 다정한 관찰자가 될 수 있다.
자기합리화는 실패의 상처 위에 급하게 덧대는 반창고와 같다. 당장은 아프지 않을지 몰라도 상처는 곪아간다. 하지만 자기수용은 상처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약을 바르고, 새살이 돋기를 기다려주는 정성스러운 돌봄과 같다.
오늘 당신의 하루에도 크고 작은 내면의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혹시 그 싸움에서 졌는가? 그렇다면 괜찮다. 당신에게 승리한 또 다른 당신은, 아마도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그토록 애써 싸웠을 테니까.
이제 그 승자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