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과도한 친절은 지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벨벳 장갑 속의 묵직한 주먹

그 친절은 왜 나를 위협하는가: 억압이 아닌 표출의 심리학


어느 날 SNS에서 50대 남성이 젊은 감각의 패션을 선보이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중, 유독 눈에 띄는 댓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는다", "꼴불견이다" 등... 많은 비난의 댓글과는 다른

맹목적인 비난이 아닌, 아주 정중하고 친절한 어투로 시작하는 장문의 글이었습니다.

그 분의 입장도 있으니 댓글 그대로를 쓰지는 않겠습니다.


"자신의 나이대에 맞는 멋을 추구하는 것도 참 아름답지 않을까요?"라는 요지의 글은 7~8줄의 장문으로, 그럴듯한 논리와 상냥함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편안함 대신 서늘한 위협감을 느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는 부드러웠지만, 그 행간에서는 제 몸을 휩싸는 듯한 거대하고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인 "좋은 관점 감사합니다^^" 또한 '친절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고마워요' 라는 말이 아닌 마치 '잘 제압된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과도한 친절' 앞에서 불편함을 넘어 위협을 느끼는 것일까요? 단순히 상대가 분노를 숨기고 있기 때문일까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 즉 미운 감정을 감추기 위해 과장되게 사랑을 표현하는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제가 느낀 것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거대한 힘이 정교하게 방향을 틀어 나에게로 '표출되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 불편함의 정체, 즉 '억압이 아닌 표출' 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에너지는 막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


우리는 흔히 부정적인 감정을 무조건 누르고 억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리적 에너지는 물리적 에너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댐에 갇힌 물이 결국 어딘가로 터져 나오거나 수위를 높이듯, 억누른 감정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에너지를 댐으로 막는 대신 수력발전소로 보내면 어떨까요? 강력한 물줄기의 힘을 이용해 터빈을 돌려 '전기'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유용한 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느꼈던 그 '친절한 댓글'의 에너지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 안에는 '나의 신념과 다른 행동은 틀렸으니 바로잡고 싶다'는 원초적인 통제 욕구나 분노라는 강력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에너지를 날것 그대로 표출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의 '내면의 전략가' 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전략가는 판단합니다. "날것의 분노는 상대의 마음을 닫게 만들고, 나의 주장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악플러'나 '꼰대'로 낙인찍히고 사회적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주장 전달의 실패 위험''사회적 관계의 비용' 을 모두 계산한 전략가는, 원초적 에너지의 방향을 틀어 '친절하고 합리적인 조언'이라는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형태로 가공하여 표출합니다.


결국 그 친절은 분노를 '숨기기 위한' 방패가 아니라, 분노를 '더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였던 셈입니다.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해소감'과 '효능감'을 느끼게 됩니다. 억압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표출에 성공한 것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전략적 친절'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온라인 댓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식당이나 매장에서 마주치는,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으로 우리를 휩싸는 듯한 직원들의 친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병원에서 나의 상황보다는 정해진 절차를 일사천리로 안내하는 의료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행동 이면에는 "고객의 잠재적 불만이나 돌발 행동을 미리 차단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상황을 통제하겠다"는 목적성이 숨어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뿜어내는 과도한 에너지는 순수한 환대가 아니라, 저항 없이 자신들의 흐름을 따르게 하려는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친절하게 말하지만, 당신은 내 말을 들어야만 해"라는 미묘한 강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감각입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이 전략을 고도로 발달시켜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 라는 심리적 체스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스스로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취하며 상대방의 감정을 교묘하게 자극합니다. 만약 상대가 그 공격성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거 봐, 역시 당신은 비합리적이군"이라며 상대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는 방식입니다.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몰아가는 이 정교한 덫은, 우리가 느꼈던 위협감의 실체를 더욱 명확히 보여줍니다.




에너지의 결을 느끼는 감각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친절을 의심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물론 아닙니다. 핵심은 말의 내용 너머에 있는 '에너지의 결' 을 느끼는 감각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 행동에 담긴 에너지의 양과 질이 그 상황과 말의 내용에 적절하게 어울리는지 내면의 감각으로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절과 관심은 나를 옭아매거나 압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따스한 햇살처럼 공간을 내어주고,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줍니다. 반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되어 있더라도 나를 통제하고 바꾸려는 의도가 담긴 에너지는 본능적인 불편함과 위축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신이 누군가의 과도한 친절 앞에서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예민하거나 부정적이어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무의식이 상대방이 발신하는 에너지의 진짜 목적지를 정확하게 감지했다는 신호일지 모릅니다.


그 미묘한 에너지의 결을 읽어내는 것. 그것은 복잡한 인간관계의 숲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가장 믿음직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들을 위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