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매일 걷는 출근길, 늘 만나는 사람들, 주말이면 으레 세우는 계획. 우리의 하루하루는 이렇게 익숙한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세상은 정해진 규칙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죠.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잠깐, 나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이 단순한 질문 하나가 우리가 믿었던 단단한 세상에 ‘쩍’하고 금을 가게 만드는 돌멩이가 됩니다. 정신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이 순간 우리가 발 딛고 있던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망적인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 사라진 자리에, 수백, 수천 개의 눈부신 조각들이 나타나는 새로운 시작에 가깝습니다.
이것을 ‘깨진 거울’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세상이 내 인생을 반듯하게 비춰주던 하나의 완벽한 거울이었다면, “왜?”라는 질문은 그 거울을 산산조각 내버린 겁니다. 이제 거울은 ‘성공적인 삶’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그림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대신, 깨진 조각 하나하나가 주변의 빛을 반사하며 제각각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아침 커피의 향기, 우연히 들은 노래의 멜로디, 친구와의 시시한 농담. 이전에는 큰 그림의 일부였던 사소한 순간들이, 이제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강렬한 ‘빛나는 조각’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깨진 조각들을 다시 붙여서 예전의 멀쩡한 거울로 되돌리고 싶다는 유혹을 느낍니다. 하지만 카뮈는 그 시도를 멈추라고 조언합니다. 억지로 붙인 거울은 왜곡된 모습을 비출 뿐,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진실은, ‘거울이 깨졌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깨진 거울 앞에서 우리가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카뮈의 대답은 놀랍도록 간단합니다. 첫째, 내 손에 들린 날카로운 거울 조각을 만질 수 있다는 것, 즉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둘째, 그 조각을 들고 있는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확실한 지식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우리가 덧붙인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이 깨진 거울로 ‘나’ 자신을 보려고 할 때입니다. 한 조각에는 내 눈이, 다른 조각에는 내 미소가 비칩니다. 내가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목록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조각들을 전부 합쳐 ‘온전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카뮈가 “나는 나 자신에게 영원히 이방인일 것이다”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 완벽하게 정의하거나 요약할 수 없는, 낯선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격언도, 사실은 이룰 수 없는 소망에 가깝습니다.
결국 깨어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완벽한 세상을 향한 기대를 내려놓고, 깨진 조각들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나조차 나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정 속에서 우리는 이상한 자유를 발견합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지금 내 손에 들린 빛나는 조각, 즉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살아갈 자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