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나라에는 소위 “문화 영웅”이 존재한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에는 괴테가 있으며, 프랑스에서는 빅토르 위고가 존재한다. 이 영웅들은 그 나라의 문화 아이콘이며 동시에 국민들의 자존심이고,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을 보여준다. 러시아에도 그런 인물이 있을까? 바로 푸쉬킨이다. 푸쉬킨은 러시아 문화에 계몽의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이며, 러시아 문화로 들어가는 “정문”이자, 새로운 러시아 탄생을 위한 진정한 문화의 “자궁”이라 외친 이는 철학자 일리인이다.
러시아의 속살을 조금 깊이 들여다본 사람들이 느끼는 수수께끼라 하나 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더 유명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보다 “푸쉬킨”이라는 시인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열광이 그것이다. 혹시, 러시아를 여행하시는 분들이여, 러시아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이들이여, 그곳에서 누구든 비난이 가능하지만 푸쉬킨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러시아를 싫어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기억하시길.
그리하여 러시아와 친구 되는 첫번째 길이 푸쉬킨을 받아들이는 것일 지도 모른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심지어 러시아를 “푸쉬킨 공동체”라고까지 규정하는 근거가 무엇일까? 19세기 초반 37살의 짧은 삶을 살다 간 한 시인을 향한 러시아의 내면이 궁금하다.
“푸쉬킨 – 우리의 모든 것!”
19세기 비평가 그리고리예프의 이 선언 이후 푸쉬킨의 신화는 공고해졌다. 그는 현대 러시아어의 완성자이자, 모든 러시아 문학 장르의 정점이 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러시아의 문제”를 바라보며 거기에 대한 “답”을 제시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러시아의 모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러시아 사회가 독재의 폭정으로 자유를 갈망할 때 러시아인들을 그를 암송한다.
“악을 일삼는 독재자여!
너와 너의 옥좌를 나 증오하여
너의 멸망과 자손들의 죽음을
잔인한 희열로 지켜보리라” (<자유>)
하지만,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리거나, 애국심이 필요할 때 사방에서 울리는 노래는 “죽는 날까지 싸울 것, 이게 바로 우리의 조약!”이라는 그의 싯구이며 동시에 출정가가 된다.
“친구여, 아름다운 영혼의 격정
조국에 바치자!” (<차다예프에게>)
심지어 어린아이 까지도 자신들의 무능한 독재자를 조롱하고 싶어 질 때 어찌해야 하는 지 알려주는 이가 푸쉬킨이다.
“만세! 쏘다니기 좋아하는 폭군이
러시아로 말 달려 오네.
…
오, 기뻐하라 백성아, 짐은 배부르고 튼튼하고 건장하여
신문기자도 짐을 칭찬 하였다
짐이 잘 먹고 잘 마시고 공약도 잘하고
국사는 걱정도 하지 않는다고” (<동화>)
국가뿐 아니라 개인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사랑에 빠진 이에게는 “난 기적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대 내 앞에 나타난 순간을” 이라는 고백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훔친다. 또한 창조의 영감에 목말라 하는 예술가에겐 “시인이여! 대중의 사랑에 연연치 마라, 열광적인 칭찬도 순간의 소음처럼 지나가 나니” 자유로운 삶을 살라고 속삭여 준다.
“푸쉬킨 – 예언자!”
1880년 푸쉬킨을 “러시아의 예언이며 지표”라고 선언한 이는 도스토예프스키였다. 푸쉬킨 동상 제막과 관련한 이 연설로 그는 러시아 최고 스타 작가가 되고, 이제 푸쉬킨은 러시아의 “예언자”가 된다. 실제로 위 에피그라프에 인용한 그의 마지막 시처럼 “죽지 않고 오래도록 민중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시는 현실이 되고, 그의 많은 글들은 마치 다빈치 코드처럼 러시아 사회 발전과 구원을 향한 예지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또 다른 위대한 시인 블록은 “푸쉬킨, 우린 당신 뒤를 따라 비밀스러운 자유를 노래했습니다”라고 외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 관한 것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금 러시아는 푸쉬킨에게서 그 예언의 글과 답을 찾아 나섰다. 이 전쟁의 속성이 서구와 러시아와의 싸움이라고 인지하는 많은 러시아인들은 200여년전 쓴 <러시아의 비방자들에게> 라는 시를 소환하여 외친다.
“어찌하여 러시아를 저주하고 위협하는가?
… 내버려 두라, 그건 슬라브인들 간의 싸움
이미 운명이 되어버린 오래된 집안 싸움
당신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
악의에 찬
당신네 아이들을 우리에게 보내라
러시아의 들판, 낯익은 무덤 사이에
그들의 자리 있을 터이니. “
어떤 가? 가히 예언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러시아, 그대 가슴에 달콤한 시간이 다가오나니, 일어서라, 비상하라!”는 시는 이 전쟁에 대한 답으로 읽혀진다.
국가의 삶이든 개인의 인생이든 모두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면 러시아인들은 거의 모든 문제에 관한 답을 푸쉬킨에게서 찾는다. 우정이 필요할 때, 쉼이 필요할때, 심지어 죽음의 침상에서도 푸쉬킨이라는 금고에서 “답”을 꺼내 온다.
가장 놀라운 것은 푸쉬킨에게서 이념의 차이가 융해된다는 점이다. 서구주의자들에게 푸쉬킨은 “유럽 문화의 전달자”이며, 그 대척점에 서있는 슬라브주의자들에게 푸쉬킨은 "외국의 영향"을 극복한 "러시아 정신"의 수호자가 된다. 러시아가 유라시아주의로 동방을 바라볼 때 “러시아는 나머지 유럽 국가와 공통점이 전혀 없나니, 우리의 역사는 다른 생각, 다른 공식을 요구”한다는 푸쉬킨의 생각을 공유한다.
푸쉬킨은 진보도 보수도, 자유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부자도 가난한자도, 어린이도 노인에게도 모두의 공통 분모이다. 그리하여 러시아인에게 “푸쉬킨은 말로 표현된 러시아”이며, 설령 러시아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푸쉬킨을 기억하고 간직한다면 러시아는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주장은 과장이 아니다.
문화 영웅을 기다리며!
러시아 문화의 지휘자로서 “푸쉬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러시아를 판단하지 말아 달라”는 유학시절 노 교수의 가르침을 30년이 지나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푸쉬킨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러시아 문화가 흘러 들어가서 새롭게 주조된다는 사실을 보며 오늘, 문득 “왜 우리에게는 문화 영웅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 우리의 영웅들은 모두 “독립 영웅”이거나 “전쟁 영웅” 혹은 “위대한 왕”들일까? 정말로 5천년 역사의 문화 민족이라는 우리에게 “문화 영웅”은 없는 걸까? 그 많은 우리의 문화 신전속에 잠들어 있는 문화 영웅을 깨워야 할 때이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넋 놓고 시간을 보내기엔 대한민국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