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디자이너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죠."
"..."
디자이너들은 개발자의 앙숙이자 천덕꾸러기로 예전부터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개발자와 대립해야하는가? 앞의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디자이너의 본업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는 개발자가 추구하는 바와도 같다. 그럼에도 그 둘이 대립하게 되는 것은 둘이 추구하는 효율성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모두의 목적은 프로젝트의 성공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디자이너도 개발자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 업체 대표님께서 어떤 디자인 업체에 디자인을 맡겼는데 봐달라고 요청을 하셨다. 규모가 있는 프로젝트라 조금 큰 업체에 맡긴다고 했었는데, 디자인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완성된 디자인을 가지고 공장에 갔더니 설계가 잘못되었다며 그 설계로 진행하려면 예상보다 2배 정도 비싼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시제품을 보러 갔다.
과연 처음 봤을 때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제품 히스토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터라 예상되는 구조나 디자인이 있었는데, 그 예상과는 달리 투박한 느낌과 함께 군더더기 같은 부분이 많이 보였다. 찬찬히 살펴보니 '언더컷'이라고 부르는 오류가 군데군데 있었고, 내부에는 '데드 스페이스'라고 부르는 공백이 상당히 크게 있었으며, 내부 부품이 지나치게 큰 덩어리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비용이 많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외형도 내부도 비효율적이라 오히려 그 예산으로 해준다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물론 위의 사례는 굉장히 심한 경우였지만, 저렇게까지 심한 사례는 아니라도 디자인이 제작 단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많다. 아니, 사실 거의 모든 디자인은 제작 단계에서 크건 작건 문제를 만난다. 어쩌면 이는 그만큼 디자이너가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발상을 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칭찬이 될 수는 없다. 나쁘게 말하면 고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디자이너들은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개개인이 추구하는 스타일을 보이는데, 이것이 강할수록 더 개성적인 디자인이 개발될 수 있지만 동시에 화면으로만 만날 수 있는 비현실적인 디자인이 양산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좋은 '컨셉 디자인'이 반드시 좋은 제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종종 포트폴리오 페이지나 공모전, 크라우드 펀딩 등을 통해 좋은 컨셉 디자인이 대중에게 공개되곤 한다. 이렇게 디자이너의 훌륭한 상상력이 만든 디자인은 멋진 형태와 이상적인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포트폴리오 페이지나 공모전 등에서 단순히 수상 실적으로 끝난다면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변의 호평에 의해 실제로 제작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문제점이 노출되기 시작할 수도 있다.
만화책이나 영화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디자인을 가진 제품이나 차량 등이 나온다. 아주 혁신적이지만, 이들이 실제로 제작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좋은 '컨셉 디자인'은 이와 같을 수 있다. 만화가나 아티스트가 디자이너와 다르듯이, 이들 컨셉 역시 실제 디자인으로 만들기에는 공정이나 안전, 사용성 등 여러 가지 경우에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2016년 초반 인디고고에서 펀딩을 통해 약 90만 달러 이상(약 10억)의 돈을 모금했다가 결국 대규모 환불 사태를 빚은 Triton - Artificial Gill 역시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한 디자이너에 의해 고안된 이 제품은 멋진 외형과 활용성으로 동시에 짧은 시간에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구현 가능성에 대한 기술자들의 의혹을 제기받았다.
위 제품은 해당 업체에 따르면, 입에 물고 물 속에서 숨을 쉬면 특수소재로 이뤄진 필터에 의해 물 속의 공기만 걸러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주는 장비로 소개되어 있다. 즉, 이름 그대로 '인공 아가미'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여러가지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먼저 과연 '인간의 폐로 빨아들일 수 있는 물의 양을 고려했을 때, 호흡에 충분한 산소를 걸러낼 수 있는가'였다. 인간의 몸 크기나 산소 소모량 등을 생각했을 때 적어도 분당 2L 이상을 빨아들여야 하는데 자연적인 힘으로는 그렇게 빨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업체는 모터와 배터리가 안에 들어가서 보조적인 펌핑을 해준다는 답변을 내놓았지만, 의혹은 계속 되었다. 초소형의 배터리와 모터의 힘이 과연 충분한 역할을 해줄 것인가에 대한 물음표가 계속되었고, 업체 측은 결국 제품의 두 '가지' 부분에 압축산소 팩이 들어가는 것으로 사양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압축산소는 산소 중독의 문제도 있었고 폭발 등의 이슈에 대해서도 안정성이 지나치게 떨어졌다. 압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극저온을 유지해야 하는데, 여러 모로 위험하다는 지적이었다. 이와 같은 수 차례의 증명 끝에 결국 처음 설명한 원리로는 작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판명되었고, 결국 프로젝트 자체가 폐기되었다.
디자이너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존재여야 한다.
디자이너는 현실만을 생각해 구태의연해서도, 그렇다고 이상만을 생각해 비현실적이어서도 안 된다. 구현 가능한 한도에서 최대한 이상에 가까운 형태와 사용성을 찾고, 이를 어떻게하면 현실화시킬 수 있을지 개략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디자이너에게는 생산공정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을 채워주는 것은 기존의 다양한 제품에 대한 '경험'이다. 결국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스스로도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많은 제품과 매커니즘을 경험해야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경험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실을 배워야 한다.
디자이너들은 현실주의자이기보다는 이상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디자인을 통해 세상을 감성적인 공간으로 바꿔보고자하는 동기가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뛰어들도록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떄문이다. 이러한 의도는 중요하며,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기존의 많은 디자인과 형태가 많은 고려와 저마다의 이유속에서 그 형태가 발생하였음을 동시에 인지해야 한다.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의 범주를 확실히 이해한다면 디자이너는 더이상 개발자의 숙적이자 천덕꾸러기가 아닌 더 효율적인 해결책을 제안하는 아군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