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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25. 2019

D-100 프로젝트
< D-100 >

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키키 키린 )

100일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살면 하루가,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갑자기 다시 시작된 부정맥 증상에 돌연 겁이 났다. 이러다 갑자기 죽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이 두렵지 않다 “라고 자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죽음이 목전에 있다고 생각하니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그런데 그 걱정이 ‘나’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걱정임을 알았다.


내가 그들에게 남길 것들, 그들과 내가 함께 했던 것들에 대한 마무리를 해놓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 두려운 공포가 될 줄이야. 이미 15년 전에 진단받은 부정맥이라 걱정, 불안, 공포는 15년 전에 끝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걱정, 불안, 공포의 실체가 ‘나’가 아님을 인지했으니 100일 동안의 시간을 구걸해서 그 실체들과 마주하고 싶다. 

그렇게 시작된 D-100 프로젝트.     


< D-100 >     

나는 100일 후에 죽는다.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마시라. 100일밖에 살 수가 없다. 


태어난 지 100일이 되면 돌잔치만큼은 아닐지라도 떡도 하고 백일상도 차리며 100일을 잘 버텨줬음을 축하한다. 중요한 거사를 앞두면 100일 전부터 날짜를 계산해가며 계획도 하고 마음의 준비도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수능 D-55일이군... 고3인 우리 큰아들이 수능 치는 것, 성적을 받는 것, 수시 지원한 학교들의 합불 여부도 알 수 있는 시간은 남았으니 다행이다. 

1 기압에서 물이 끓는 것도 100도요 대부분의 시험도 100점이 만점이고 1세기는 100년이다. 항상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을 100%라고 하고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일당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100일이란 없다. 죽음은 늘 예측할 수 없으니. 

물론 죽음을 생각해 오늘의 삶을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지에 대한 책이나 강연은 많다. 하지만 100일 후 죽게 되는 사람이 계획표를 작성하는 일은 보지 못했다.

사실 계획표를 작성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이다. ‘Death Note’가 되어서 100일 후에 진짜로 죽으면 어쩌나 하는.... 마치 일요일 낮에 하는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에나 나올법한 얘기처럼...

그래도 해보고 싶다. 

100일 동안 죽음을 준비하며 차근차근 삶을 정리하는 나를 지켜보고 싶다.      


일단 큰 계획부터 세워보기로 한다.

무엇을 정리하고 싶은가?

일단 집 정리를 해놓고 싶다.

이건 마치 첫 아이를 출산하러 가기 전날 밤을 새우며 집 정리를 하던 것과 같다. 예정일을 열흘 앞둔 날 밤,  갑자기 물컹하고 이슬이 느껴지자마자 내가 한 일은 화장실 청소였다. 진통의 간격을 체크하면서 냉장고를 정리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집안 구석구석 걸레질을 했다. 며칠간의 공백을 느끼지 못하게 남편의 양말과 속옷을 모두 빨아 놓았다. 부부 둘이서 사는 집이었으니 크게 치울 건 없었지만 처음 경험하는 출산을 앞두고 할 수 있는 모든 정리를 마쳤다. 


지금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처음 경험하는 죽음을 앞두고 내가 벌려놓은 살림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죽은 아내의, 엄마의 짐 정리를 하면서 남편과 아들들이 엄마 욕을 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뭔 살림이 이렇게나 많아?",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이야?", "이건 도대체 왜 산거야?".  물론 그럴 사람들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살림이 전업이었던 ‘나’의 자격지심 같은 거다. 한때 떡에 미쳐서 밤마다 주문한 떡을 찌고 약과, 한과, 육포를 하느라 늘어난 살림살이가 제법 된다. 게다가 떡으로 번 수입 중 일부는 나를 위해 선물하겠노라며 사 모은 그릇은 또 얼마인가... 돌이켜보니 다 집착이고 욕심이었다. 옷장 정리도 해야겠지? 100일 후면 겨울이니 겨울옷을 모두 잘 꺼내 주고, 계절별로 옷을 정리해 놓고 안 입는 옷들은 버려주어야지. 다락방에 올려놓은 물건들도 쓰지 않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니 팔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어야지. 


집 정리가 끝나면, 사실 그다지 할 일이 있어 보이지는 않군. 정리할 재산은 없고, 내가 빚진 사람들과 금융권 대출 등에 대해서 정리해 두어야겠다. 1년 전 오픈한 디베이트 교습소 사무실도 어떻게 정리할지에 대한 가이드를 남겨놓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기억들을 하나하나 더듬어봐야겠다. 사랑하는 사람들, 인연이 깊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을. 그러다 보면 순간순간 점으로만 존재하던 내 삶들이 하나로 이어지리라. 

connecting the dots.


첫날이 끝나간다. 막연한 계획만 난무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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