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키키 키린 )
100일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살면 하루가,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백지연 같은 며느리’
를 보고 싶다던 시아버님은 당신의 아들과 함께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어쩌면 ‘백지연 같은 며느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21살의 여학생을 만나신 후 한 달 뒤에 돌아가셨다. 수년간 투병 중이셨기에 돌아가시기 전에 막내아들 여자 친구 얼굴이라도 보자는 맘이셨던 것 같다. 그때 뵙지 못했다면 난 기일에, 오늘같이 성묘를 갔을 때 전혀 기억에도 없는 분을 어떻게 떠올려야 하나 난감했을 것 같다.
한 번밖에 뵌 적 없는 그분께 난 참 양심도 없지... 늘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린다.
“저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세요~”
“댁은 뉘슈?”라고 하실 판이다.
아버님은 남편과 내가 사귄 지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대기업 CEO로 한창 승승장구하시며 이제 숨 좀 돌릴까 하던, 50 중반을 조금 넘기셨을 무렵이었다. 가족의 상심은 컸고,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큰 슬픔은 나에게도 컸다.
그래도 그러지 말았어야지 싶다.
3일 동안 장례식장에서 신발정리 등의 허드렛일을 도와드리며 오빠 곁을 지켜주었다. 그땐 그게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밤마다 집에서는 삐삐가 왔다. 전화를 드리면 빨리 집에 안 오고 거기서 뭐 하고 있느냐고 하실게 뻔하니 아예 전화도 안 드렸다. 마지막 날 장지까지 따라갔다가 밤늦게 귀가한 내게 아버지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일 트럭 불러줄 테니 짐 다 싸서 그 집으로 가버리라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닌 여자애가 어디 남의 집 장례에 가서 3일 밤낮을 있느냐, 그 집에서 우리 집안을 뭘로 보겠느냐...
물론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이후로 아버지가 날 용서하시고 오빠를 받아주시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큰 불효를 저질렀는지를... 몇 날 며칠 들어오지 않는 다 큰 딸을 기다리시던 초조함, 혹시 사돈이 될 수도 있는 집안에 초장부터 책잡힐 짓을 한 딸의 무모함에 대한 수치스러움, 딸에게 부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생겼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상실감.
다행히도 19년째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지만 여전히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나이가 들수록 철이 든다는 건, 그저 나이를 먹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겪었을 미숙함, 실수, 후회들이 모두 모여 어느 수준이 되었을 때 철이 한 단계 한 단계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올해 초, 1월이었나? 몇 년 전 우연히 봤던 점괘에서 큰아이가 고3 되기 전에 아버님 산소에 가서 영가 옷을 태워주면 잘 풀릴 것이라는 소리를 들은 게 화근이 되었다. 동지 지나 설 전에 꼭 해주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일러준 대로 준비를 했다. 영가 옷과 10원짜리 동전 7개, 바비큐 그릴을 준비해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산소에 갔다.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의 첫 상견례가 결혼 19년 만에 시아버지의 산소 앞, 손주의 무사안일한 고3을 염원하는 의식을 치르며 이루어졌다니... 뭔가 찡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늘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 엄마 지갑에서 몰래 훔쳤던 5천 원, 고등학교 시절 부부싸움하시는 모습에 화가 나 입속으로 읊조리던 욕, 부도가 난 아버지에게 “사업은 왜 하셔 가지고...”라고 원망했던 것, 내 자식 챙기느라 부모는 뒷전이 된 지금....
그런데 부모님은 나에 대해 늘 잘한 것만 기억하신다.
항상 반장을 도맡아 했던 학창 시절, 동생과 우애 좋은 언니, 애교는 없지만 묵묵히 부모를 돕는 맏딸, 행복하게 잘 꾸리는 결혼생활. 그러면 다시금 죄송스러워진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백지연 같은 며느리’가 되지 못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집에서 아이들이나 잘 키우고 살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19년을 이것저것 열심히 배우고 만들고 팔고 공부하고 가르치며 살았다.
99일이 이렇게 지나갔다. 시아버지의 산소를 다녀오고 부모님에 대해 회상하며...
백지연 대신 내가 좋아하는 손석희 앵커의 클로징 멘트로 마무리한다.
“내일도 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