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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25. 2024

기대 없이 받는 선물이 기쁘다지만...

얼마 전 집을 나서는데 아파트 1층 우편함에 군사우편 하나가 들어있더구나. 네가 후반기교육을 받는 제1수송교육연대로 이동한 후였지. 보내는 사람에 네 이름이, 받는 사람에 엄마아빠의 이름이 쓰여있더라. 통화는 매일 하고 있지만 흰 봉투에 담긴 편지가 주는 설렘은 또 다른 것이어서 엄마는 바로 뜯어보지도 못하고 품고 다녔단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 가장 한적한 장소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읽어볼 생각이었지. 운전하는 동안 편지봉투를 조수석에 태우고는 마치 널 바라보듯 틈날 때마다 쳐다보았단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열었다. 명함 크기로 작게 접힌 종이가 들어있었지. 뭘 이렇게 작게 접었대 하며 펼치려는 찰나, 종이에 비친 인쇄된 글씨가 눈에 들어오면서 '아...'하고 짧은 탄식을 했다. 'OOO이병 부모님께. 먼저 귀하고 자랑스러운 아드님을 대한민국 육군에 보내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안내문이더구나.


손편지라면 질색을 하던 네가 웬일인가 싶어 설렜던 마음은 순식간에 실망으로 바뀌었단다. 동시에, 괜한 기대감으로 혼자 부풀어 올랐던 내 마음에도 실망했지. 자식의 삶이 내 욕망이 되면 안 되는데 아직도 내려놓지 못했구나, 기대와 실망이라는 건 너와는 별개로 내 마음에서만 일어나는 풍화작용인데 또 다스리지 못했구나, 싶었단다.



요즘 네 형은 엄마에게 자주 기쁨을 준다. 5분마다 울리는 수십 번의, 매번 다른 알람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늦잠을 자던 네 형이 새벽 5시에 벌떡 일어나 운동을 하러 갔을 때. 야식을 먹고 빈 그릇과 수저를 그냥 던져두지 않고 설거지해 놓았을 때.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단다. 어떤 기대도 품지 않았을 때, 잔소리를 퍼부어 억지로 받은 선물이 아니었기에 더 기뻤겠지. 온전한 기쁨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아무 기대 없이 네가 보낸 안내문을 다시 펼쳐보았단다. 그러다 종이 한 귀퉁이에서 깨알같이 작게 쓴 네 글씨를 발견했지.

"잘 지내볼게."

한껏 기대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선물이었다. 이 짧은 문구 하나가 주는 기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단다. 좀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좀 더 빨리 마음을 내려놓았더라면 더 오랜 시간 행복했겠지만 이만큼의 행복은 아니었겠지.


언제 갑자기 훅 들어올지 모를 기쁨을 기대하며 이제라도 마음을 내려놓자고 다짐하다가, 이 또한 다른 이름의 기대라는 생각에 '아차... 내려놔야지...'하고 자신을 다스렸단다. 너희들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또 어느 순간 깜짝 선물 같은 기쁨을 줄지도 모른다는 나의 기대가 참 못마땅하구나.

이런 부족한 자신을 다스리며, 엄마도 잘 지내볼게.


그런데 말이다...

잘 지내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선물은 자꾸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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