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원한 보리차 한잔 >
퇴근하는 남편 손에 검은 봉다리가 들려있었다.
흔한 일은 아니다. 집에 오는 길에 슈퍼에 들려 주전부리를 사들고 오는 경우도 거의 없는 사람이다.
정성스레 쌓여있는 포장상자보다도 더 궁금증을 유발하는 검은 봉다리...
아파트 입구에 자리 잡은 트럭에서 샀다는, 포일에 쌓인 통닭 두 마리가 들어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갓 지난 터라 아이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날 또 추억 속으로 데려다주었다.
아버지도 가끔 통닭을 사 오셨었다. 세 마리에 만원. 영계백숙용이다 싶게 작은 닭 세 마리. 함께 들어있던 겨자 꿀소스에 찍어먹으면 세 마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던 기억...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음식들이 꽤 있다.
일요일 아침, 늦잠을 주무시는 엄마를 대신해 만들어주신 당근 잔뜩 들어간 계란찜.
명절 연휴가 끝날 즈음, 남은 전들을 잔뜩 넣고 끓여주신 김치찌개.
겨울이 되면 낙지와 생태, 굴을 넣고 정성스레 만들던 보쌈김치.
춘장을 볶고 돼지고기와 양파를 잔뜩 넣은 자장면. 면도 직접 만드셨더랬지.
특별한 외식이 필요한 날 데려가 주었던 수원의 경양식집 함부르크....
그런데 신기하게 엄마를 기억하는 음식, 대표하는 음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전히 외식을 싫어할 만큼 집밥에 연연하시고 웬만한 음식은 다 집에서 손수 만들어 주셨으며 심지어 솜씨도 좋으신데... 너무나도 일상인 집밥이라서 엄마를 기억할 메뉴가 남아있지 않다는 아이러니...
김치찌개, 된장찌개, 불고기, 갈비찜, 잡채, 콩나물무침, 시금치나물, 각종 김치, 멸치볶음, 미역국, 콩나물국, 배춧국, 약식, 시루떡, 식혜, 각종 전, 김밥, 돈가스, 햄버거 스테이크, 탕수육, 곱창전골....
못하는 음식 없이, 안 먹어본 음식 없이, 맛없는 음식조차 없던 엄마 음식 이건만 '바로 이것'이라고 떠올릴만한 게 없다.
어쩌다 이벤트성으로 해주거나 사준 아버지 음식만이 기억에 남아있다니...
사정은 우리 집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아빠가 언젠가 해준 김치볶음밥이 엄마가 해준 그것보다 훨씬 맛있었다고 한다.
엄마를 떠올릴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시원한 보리차"라고 한다.
아무리 맛있고 비싼 음식을 먹고 들어와도 우리 가족들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는 일은 냉장고에서 시원~~ 해진 보리차를 마시는 것이다. 보리차 한잔을 마시고 나야 "아~~ 잘 먹었다~"로 식사를 마무리하는 의식.
유난히 우리 집 보리차는 맛이 있다고 했다.
흔하디 흔한 보리 티백을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 빼는 것이 어디가 그렇게 맛있다는 것인지...
엄마가 만든 음식 중 기억나는 게 보리차라는 것은 기억에 남는 음식이 없다는 얘기의 다른 말이다.
내심 서운하긴 하다. 내가 해댄 밥이 몇끼이며 나름 맛있다고 자부할만한 음식도 있는 터인데...
그래도 그렇게 일상에 스며든 맛으로 기억되는 '엄마'라서 반갑기도 하다.
먼 훗날, 보리차 한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할 수 있을 테니...
유난히도 보리차를 잘 끓였던 엄마...
에잇... 성에 안찬 건 안 차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