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크루 혜윰 작가의 <주말은 십(詩) 니다> 2025.11.01
<아닌 것> 에린 핸슨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와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의 웃음 속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당신이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당신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
당신이 여행한 장소들
당신이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교육자원봉사센터에서는 1년에 한 번, 12월에 교육자원봉사 활동 사례 나눔 행사가 열린다. 1년 동안 용인의 학교에서 각자의 재능을 나눈 봉사자 선생님들이 한데 모여 활동 내용과 소감을 나누는 자리다. 10개 팀, 100명 남짓한 봉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나눈다. 우리 모두는 교육자원봉사센터라는 같은 기관 안에 소속되어 있지만 봉사뿐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강사로 활동하느라 1년 내내 서로 얼굴 한 번 못 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에는 디베이트 팀에서 해보는 게 어때요?"
딱 한 달 전이었다. 월례회의에서 사례 나눔 행사의 여는 마당을 누가 맡을 것인가를 논의하던 중이었다. 대면대면하던 서로를 한데 모으고 행사의 흥을 돋우는 시간이기 때문에 여는 마당을 맡는 팀은 늘 전래놀이팀과 회복적 생활교육팀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두 팀 모두 강의 일정 때문에 상당수가 참석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서로 눈치를 보던 와중, 내 옆에 앉아있던 그림책놀이 봉사단장님이 공을 쏘아 올렸다. 나를 지목한 것이다.
"아... 디베이트는 너무 아카데믹한데요..." 라며 완곡한 거절의 메시지를 던졌는데 "우리 팀도 아카데믹하거든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재미있게 할 자신이 없다는 얘기예요." 라며 더 강한 거절의 메시지를 던졌지만 "한번 해 봐요~ 재미있게 만들면 되지."라는 응원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심각한 숙제 하나를 맡게 되었다.
디베이트 강의에서는 100명의 인원도 상관이 없다. 집체로 하는 디베이트 형식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은 완전히 다른 형식의 진행이 필요했다. 행사의 취지와 내가 맡은 코너의 목적을 고려하고 교육청의 요구사항을 더해 몇 가지 기준을 정했다.
행사장의 봉사자가 모두 참석할 것.
20여분으로 짧게 진행할 것.
OX퀴즈처럼 탈락자를 발생시키고 최종 몇 명에게는 상품이 있도록 구성할 것.
재미와 의미를 함께 갖출 것.
디베이트의 정체성을 전달할 것.
몇 개의 AI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너무 뻔하거나 복잡한 방식을 알려주었다. 일주일 정도를 내내 고민했다. 나를 추천했던 단장님을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도대체 디베이트를 어떻게 재미있는 놀이로 만드냐고. 작년 여는 마당에서 노리재미팀이 했던 강강술래만큼의 흥을 디베이트가 어떻게 끌어올리냐고.'
고민을 넘어 고뇌의 시간을 보낸 끝에 드디어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마침 돌봄 교실 자원봉사가 있어서 1,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봤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유레카!!!
교육청 담당자에게 프로그램 계획서와 PPT를 보냈다. 활동에 필요한 교구를 만들고 간단한 큐시트 작성까지 마친 후, PPT를 돌려가며 여러 번 연습했다. 그리고 드디어 행사 당일. 60명 남짓한 봉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나름 성공적으로 행사의 문을 열었다. "재미있었어요~", "쌤, 역시~"라는 반응을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됐다.
늘 게임식 디베이트 수업에 대한 갈증이 있던 터였다. 디베이트 자체가 학구적이고 진지하기 때문에 전달하는 방식만큼은 재미있어야 했다. 학생들이 원하는 주제로 디베이트를 하는 것이 내가 했던 최선이었는데, 이번 행사준비를 계기로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린 기분이었다.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배워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대학원에서 배우고 있는 여러 토론 기법에서 큰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9년째 디베이트 강사를 하고 있지만 늘 어딘가 한구석 아쉬움이 있었는데, 그게 해소되고 양질의 콘텐츠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인문학적 배경지식을 채우기 위해 수년동안 무작정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된 것처럼, 형식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학업이 도움이 되었다.
디베이트를 가르치면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유연한 사고다. 어떤 의견이든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일단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무조건 불평, 불만, 비난해서는 안된다. 객관적 근거와 논리적 설명을 통해 무엇이 왜 다른지, 어디에서 갈등이 비롯되는지를 파악한 후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 간혹, 유연한 사고를 가진 디베이트 강사라면 상대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해야 한다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줄 의무도 함께 갖는다. 최소한 '고집스럽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디베이트 강사라니'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큰 이유다.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미식 예찬』에서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라고 했다. 사람의 생존과 일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음식에 갖고 있는 마음, 태도, 실제로 섭취한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그가 삶과 세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한 사람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르치는 것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까?
논쟁거리에 대해 찬반의 입장에서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것.
상대가 말할 때는 상대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경청할 것.
객관적 근거와 논리적 설명으로 주장을 펼칠 것.
불평불만비난만 하지 말고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대안을 생각해 볼 것.
매 순간 고민하고 질문하고 소통할 것.
내가 틀릴 수 있음을 감안하고 겸손할 것.
학생들에게 위의 것들을 전할 때 떳떳한 선생님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말하면서도 뜨끔한 장면이 머릿속에 몇 개씩 떠오를 테지만, 자꾸 떠올리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디베이트를 배우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를 꿈꿀 수 있는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 디베이트를 잘 가르치는 기술보다, 가르치는 내용과 비슷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교수기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