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잠 푸른 새벽

by 늘봄유정

< 붉은 잠 > - 송유정


붉은 달이 떴다

R은 읽고 있던 [레드북]에

서둘러 입을 맞춘다


거울 뒤에서 빨간 립스틱을

옷장 속 푸른 상자에서 빨간 원피스를

침대 밑에서 빨간 구두를


한 손에 하나씩

붉은 석류 두 알을 들고

옥상에 오른다


붉은 달을 향해

붉은 수류탄을 쏘아 올린다

그라나다 그라나다


창공을 가르던 붉은 파편들이

머리 위로 떨어지면

붉은 잠이 끝난다


검은색 구두

감색 슈트

붉은 넥타이


푸른 새벽이 열린다



'달 · 잠 · 책 · 석류 · 구두'

위의 다섯 단어를 조합해 글을 쓰는 것이 라라크루 13기 합평회의 미션이었다. 단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면 글감이 떠올라야 하는데 나는 오로지 색깔만 떠올랐다. 붉은 달, 붉은 잠, 붉은 책, 붉은 석류, 붉은 구두. 글을 써야겠다고 작정한 이상 어떤 색을 입혀도 서사가 생겨나겠지만, 붉은색을 입힌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업 때문이었다.


정신분석으로 커뮤니케이션의 실체를 다루는 강의를 듣고 일주일에 하나씩 에세이를 써서 제출해야 한다. 인간의 결핍과 억압된 욕망, 거기에서 오는 소통의 한계와 오류, 자기 파괴, 사회의 갈등과 분열, 이를 해석하는 여러 학자의 견해··· 이 안에서 허우적대다 보면 서서히 내 정신세계에도 균열이 오고 구멍이 생기는 게 느껴졌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아서 틈날 때마다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관련된 글을 읽다 보니, 잠만 자면 컬트 영화 한 편이 상영됐다. 밤새 영화 속을 헤매다 그걸 또 발표하고 피드백을 받아야 잠이 끝났다. 어지간히 힘들었나 보다.


< 멀홀랜드 드라이브 >라는 영화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분석해 발표한 적이 있다. 여러 차례 영화를 보고, 관련된 자료를 찾으면서 영화 속 상징을 정리하다 보니, 색깔은 인간의 욕망과 억압, 현실을 설명하는 데 효과적인 장치였다. 영화에서 붉은색은 강렬한 열정과 욕망, 꿈과 환상의 세계, 열정과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의 고통을 상징했다. 반면 푸른색은 냉정하고 가혹한 현실을 의미했다.


위의 다섯 단어를 조합해 나도 그런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다. 현실 속에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억눌린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붉은 달, 붉은 잠, 붉은 책, 붉은 석류, 붉은 구두'를 각각 검색창에 입력했다.


붉은 달은 변화·불길한 징조·신성한 사건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다.

붉은 책은 카를 구스타프 융의 < 레드북 >이 딱 어울렸다. 융 심리학의 모태가 되었다는 이 책은 융이 직접 경험한 정신세계를 담았다고 한다.

빨간 구두는 욕망과 열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며 동화에서는 탐욕과 멈출 수 없는 욕망을 상징했다.


석류는 영어로 풍요, 다산,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금지된 욕망·죽음과 재생·경계의 상징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석류는 영어로 'pomegranate'라고 하는데, '사과(pome)'와 '많은 씨앗을 가진(granate)'이라는 라틴어 어원에서 유래했다. '씨가 많은 사과'라는 의미로, 안에 든 수많은 씨앗 알갱이 때문에 붙여졌고, '수류탄(grenade)'의 어원이기도 하단다. 프랑스어에서 석류를 일컫는 단어인 grenade는 수류탄의 이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내면의 욕망과 열정을 충분히 발산하게 되는 붉은 잠에서 깨면 차가운 현실에 순응하는 삶이 펼쳐지지만,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존재가 진정한 '나'다. 환상이 있어야 가혹한 현실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환상 속에서 나는 브런치 대상 수상에 빛나는 작가가 되고 유퀴즈에 나가 그간의 활동을 담담하게 말한다. 디베이트와 교육자원봉사가 내 인생에서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 공동체에 어떤 기여를 하고 싶었는지를 말하다 보면 내 삶이 꽤 충만하게 느껴진다.

현실 속에서 나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작가로 불릴 뿐이고, 디베이트와 교육자원봉사로 소소한 생활비 정도를 충당하며 허덕이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일상을 꿋꿋하게 붙들고 살 수 있는 것은 매혹적인 빨간 맛의 환상 때문이 아닐까.


BCO.1bdf0634-5415-4a3e-aad7-fee7fab4bf24.png AI에게 위 시를 주고 그림으로 표현해달라고 했다. 근육질의 다리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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