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크루 화요일엔 샛길독서 : 데미안 2
( 라라크루에서는 화요일마다 윤병임 작가님이 독서의 샛길을 안내합니다. 함께 읽고 생각하여 글로 남기는 작업입니다.)
나는 크로머라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자신의 힘과 노력을 통해서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의 오솔길들을 똑바로 걸으려고 했는데, 그 길들이 내게는 너무 미끄러웠던 것이다. 친절한 손 하나가 나를 구해낸 지금, 나는 눈길 한 번 팔지 않고 곧장 어머니의 품 속으로, 포근히 에워싸인 경건한 유년의 아늑함 속으로 달려왔다. 나는 자신보다 더 어리게 더 의존적으로, 더 어린애처럼 만들었다. 나는 크로머에 대한 예속을 새로운 의존으로 대치해야만 했던 것이다. 혼자는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데미안, 62쪽, 민음사)
* 최근 나의 안정을 흔들어 놓은 거친 소용돌이가 있었나요. 그것은 무엇이었나요?
* 그 소용돌이, 방황 끝에 결국 나는 어디로 돌아왔나요?
* 지금 나를 구속하고 예속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데미안으로 엮은 첫 번째 글을 올리자마자 글을 읽은 남편에게서 톡이 왔다.
"이것도 아들이 닮은 건가?"
질문과 함께 보낸 사진에는 엉망으로 어질러진 내 책상 모습이 담겨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일탈을 낭만으로 생각하며 즐겼던 모자(母子)의 공통점은 책상 위 세계에서도 맞닿아 있었다.
"집안 전체가 그렇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라고 당당하게 답했지만, 민망과 수치 어디쯤에서 자극받은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말았다. 책상을 정리하고 나서 큰아들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책상 위의 물건들만 제자리에 가져다 두면 그만이었던 내 책상과는 달리 큰아들의 방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아들에게 방 정리를 주문했다면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나중에 내가 할게." 그 말은 '지금도 하고 싶지 않고 나중에도 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방을 놔둘게.'라는 말의 변형이었다. 그러니 정리정돈은 당장 눈과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의 몫이었다.
반나절에 걸친 작업 끝에 아들의 방은 말끔해졌다. 불필요한 묵은 짐을 정리하고 청소까지 마치고 나니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졌다. 비로소 주부이자 엄마, 하숙집 주인으로서 제 몫을 다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매년 1월이면 도지는 신경증, 까닭 모를 우울과 불안으로 점철됐던 머릿속도 말끔해졌다.
싱클레어가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은 데미안 덕분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던 그는 자신이 원래 있었던 안온한 세계에 집착하며 데미안을 멀리한다. 새로운 형태의 구속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데미안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세상이 자아를 향해 가는 길이며 그것은 카인의 표식처럼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데서 온 것이었다.
싱클레어는 두 세계의 경계에서 안온함이 주는 지루함과 일탈이 주는 짜릿함, 구속이 주는 고통과 해방에서 오는 평화를 경험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더 깊이 들어가야 하며, 그 과정이 순탄치 않지만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어질러져 있던 책상만큼이나 어지러웠던 내 속내를 정리하게 된 것은 남편 덕분이었다. 그것은 크로머의 구속이 아니라 데미안의 구속과 닮았다. 내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그리하여 다시 온전하고 단단하게 세상에 나오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알을 깨고자 하는 사람에게 구속은 자유로 이어지는 법이다. 따라서 어떤 구속은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