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적이다 뒤척인다

by 늘봄유정

⭕ 라라크루 혜윰 작가의 <주말은 십(詩) 니다> 2026.1.31


<뒤적이다> 이재무


망각에 익숙해진 나이

뒤적이는 일이 자주 생긴다

책을 읽어가다가 지나온 페이지를 뒤적이고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거듭 동선을 뒤적이고

외출복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뒤적인다

바람이 풀잎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햇살이 이파리를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달빛이 강물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

뒤적인다는 것은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

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

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다



친구의 집 정리를 도와주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의 본가다. 친구 부모님이 쓰시던 물건들을 정리 중인데, 처분하기에는 하나하나 사연 없는 물건이 없다. 그중 쓸만하지만 친구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을 중고 물품 앱에 올려 판매하는 일도 내 담당이다.


팔려는 물건 중에는 친정어머니의 눈에 쏙 드는 물건들이 제법 있었다. 친구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이시니 그럴 테다. 궁금해하시길래 우리 집에 들러 구경이라도 해보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미사가 끝나자마자 지하철을 타고 한달음에 오셨다.


수북이 쌓인 물건을 뒤적이며 눈이 휘둥그레진 어머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잘 생각하시라고. 갖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가져갔다가 후회할 수도 있다고. 성하고 괜찮은 물건이 많지만 모두 품을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살펴보아야 한다고. 게다가 친구 물건이니 가능하면 잘 팔아서 현금으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물건을 들어서 살펴보고 내려놓고, 다시 들었다가 혼잣말로 마음을 다잡기를 여러 번. 엄마는 지하철을 타고 돌아갈 때 들고 갈 수 있는 물건 몇 개 만을 골랐다. 모피 목도리를 목에 둘러보면서는 "나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라고 소녀처럼 좋아했고, 뜯지도 않은 새 홈웨어를 골랐을 때는 "지금 입고 있는 나긋나긋한 거 버려야겠다. 이런 건 잘 안 사게 되더라."라며 "득템~"이라는 요즘 말까지 썼다.


집에 갈 채비를 마치고도 뭔가 아쉬우셨는지, 이미 중고 물품 앱에 올려둔 물건들을 모아둔 작은 방문을 슬쩍 열어보셨다. 이미 크고 작은 쇼핑백에 넣어둔 것들이었다. "이건 뭐니? 아.... 저건 뭐니? 아...."를 반복하며 가방을 뒤적이다가 "어머, 이거 예쁘네." 하신 물건이 있었으니, 모시 조각보나 한복지로 만든 차 받침 모음이었다. 집 안 구석구석에서 찾아 모아둔 것이라 제각각이었지만, 전통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 좋아하실만했다. 안 팔리면 당신한테 팔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떠나시는데, 눈에 아쉬움이 그득했다.


며칠 뒤, 함께 장을 보러 가기 위해 다시 만났을 때도, 차 받침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 거 다 짐이에요, 짐. 살면서 얼마나 쓴다고."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어머니는 갖고 싶은 이유를 처량하게 댔다.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꼭 그런 차 받침 위에 차를 내어주는데, 당신네 집에는 없다며 "나도 그런 거 쓰고 싶다"라고 했다.


알았다고, 안 팔리면 꼭 드리겠다고 안심을 시켜드리고 집에 왔는데, 하필 구매하고 싶다는 이가 나타났다. 지난번 모시 조각보를 샀던 분이었는데, 세트로 같이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몇 푼에 눈이 멀었는지, 갖고 싶다는 엄마의 애원에 괜히 반발하고 싶었는지, 냅다 팔아버리고 말았다. 그래 놓고는 엄마의 간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려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갖고 있는 차 받침을 그러모았다. 전통음식을 배울 때 사 모은 것들이었다. 나야말로 살면서 쓰지도 않는 짐을 꽤 많이 쌓아두고 있었다.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차 받침 두 세트를 어머니께 드리려고 챙겨놓았다. 갖지 못하게 된 알록달록한 모시 조각 차받침을 더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긴 하지만, 친구분들을 초대했을 때 받침으로 쓰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자식들이 어릴 때, 때로는 순순히 들어주고 때로는 어르고 달래고, 어느 날엔 혼내기도 하면서 자식의 온갖 요구에 대처한다. 그러면서 밤마다 뒤척였다. 들어줄 걸 그랬나, 들어주지 말 걸 그랬나. 내 판단이 최선이었는지를 고민하던 긴 밤이었다. 그런데 자식이 다 크고 나니 남는 후회는 하나였다. 그게 뭐라고 안 들어줬을까.


부모님도 마찬가지리라. 그깟 차받침이 뭐라고, 짐 하나 더 들이는 게 뭐 대수라고 그걸 못하게 막았을까 깊은 후회를 하며 뒤척일 밤이 덜컥 두려워진다. 부모님이 남긴 짐을 뒤적이며 숱한 후회를 하게 될 어느 날이 말이다. 그게 뭐라고 안 들어줬을까.


왼쪽은 팔아버린 차받침, 오른쪽은 어머니 드리려고 챙겨놓은 차받침. 사실, 왼쪽이 어머니 취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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