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Oct 05. 2019

D-100 프로젝트
< D-85 >

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키키 키린 )

100일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살면 하루가,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된장, 간장, 고추장, 매실청, 청귤청, 유자청, 오미자청, 자몽청, 레몬청, 고추청,  곰취장아찌, 고추장아찌, 명이 장아찌, 오이지, 배추김치, 총각김치, 열무김치, 보쌈김치, 오이소박이, 동치미.

1년 동안 '담그는' 것들이다. 격년으로 담그는 애들도 있고 매년 빼먹지 않는 애들도 있지만, 난 늘 뭔가를 담근다. 오늘도 고추청을 담갔다. 청홍고추를 송송 썰고 층층이 놓은 뒤 설탕을 뿌려주면 끝.


들을 담그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쉽다.

이런 것들을 담근다고 하면 모두들 한결같은 반응이다.

"우와~~, 별걸 다 하시네요.", "요리를 엄청 잘하시나 봐요~"라고.

그런데, 한두 번 담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게 얼마나 쉬운지. 그저 신선하고 좋은 재료들만 있으면 난 그저 거들뿐이다. 심지어 된장도 메주와 소금과 물만 있으면 되고 내가 할 일은 그저 관심을 가져주는 것뿐이다.


둘째, 실용적이다.

난 요리는 쉽고 빠르고 간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맛있게 먹어주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누군가에게 소비되지도 않을 '인스타'용 요리가 아니라 꾸준히 맛있게 섭취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 열거한 아이들은 완벽한 요리다. 거창한 반찬이 없어도 그저 자기 자신이 요리인 아이들도 있고, 거창한 반찬, 소소한 반찬을 위한 숨은 공신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나의 요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밥상을 위해서도 실용적이다. 갑자기 지인을 만나러 갈 때,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은 손을 내밀게 해 준다.


셋째, 생산적이다.

내가 저 아이들을 담그는 때는 주로 마음이 심란할 때였다. 사춘기 아들이 방문을 꽝 닫고 들어가 박혀있을 때, 새벽 2,3시가 돼도 남편이 들어오지 않을 때, 해결 안 되는 돈문제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지인과의 미묘한 감정싸움이 있을 때 등등. 답답증이 맘에 찾아오면 난 재료를 주문했다.

친한 지인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넌 시간이 48시간이니? 넌 어떻게 그런 걸 다 담그고 살아?" 처음엔 "그러게?" 하며 우쭐했었다. 그런데 난 시간을 다르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고, 네일숍을 가고, 쇼핑을 하고, 기도를 하러 교회에 가던 그 시간에  나는 제철 재료를 사서 담그는 일을 했던 거다. 다만 휘발되고 마는 일 대신 소비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생산적이었다 할 수 있다.


넷째, 생각이 깊어진다.

바구니 가득 들어있는 매실의 꼭지 따기, 5kg의 유자 채썰기 등의 단순한 일들을 하면 혼자 사색에 빠진다. 내가 쏟아냈던 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상처 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속뜻이 있겠거니 생각되는 타인의 말도 생각하게 된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곱씹으며 반성하게 되고, 앞으로 일어날 일,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머릿속으로 도상훈련을 해보게 된다. 살면서 이런 시간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 가만히 누워있어도 생각은 그다지 정리되지 않는다. 손으로 단순한 노동을 하다 보면 머릿속도 정리되는 기분. 그 기분에 중독되어 오늘도 무언가를 담그나 싶다.


무언가를 설탕이나 간장, 소금에 담그면 당장은 못 먹는다. 일정 시간 숙성이 되어야 비로소 먹을 수 있이용할 수 있게 된다. 순간의 온갖 감정들을 담금질한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꺼내보면 성숙된 감정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내가 없어지면 이 1년간의 루틴들도 우리 집 주방에서 사라질 거다. 베란다의 된장 항아리를 보거나 바닥을 드러내는 김치, 고기 먹을 때 곁들이던 장아찌를 보면서 날 생각해주겠지? 그래서 담그고 또 담가야 하겠다. 아마도 꼬부랑 할머니가 되서까지 담그지 않을까... 싶다. ㅎㅎ

작가의 이전글 D-100 프로젝트 < D-86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