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키키 키린 )
마을교사 회의 중 갑자기,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어지럼증이 왔다.
왼쪽 시야의 아랫부분이 아지랑이 피듯이 흐물거리면서 두통이 밀려왔다. 당황스러움과 함께 프로젝트에 안일했던 마음가짐이 떠올랐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가정을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여겨 글의 소재로나 소비하고 있었다니. 사실 나뿐만 아닌 누구라도 100일 후, 86일 후가 아닌 지금 당장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데 말이다.
컨디션 난조를 핑계로 해야 할 일을 피할 수는 없는 일. 사무실 출근을 했다. 개업을 한지 어영부영 1년이 됐다. 집기를 들이고 책을 정리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학생 모집이 안 될 줄은 몰랐는데... 나의 안일함은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타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선생님들을 보면 최소 3,4년 되던 해부터 입소문도 나고 가르치던 학생들의 동생들 반도 꾸려지고 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하시니 겨우 1년 버틴 내가 징징 거릴 일은 아니지만, 애타는 마음이야 없을 리 없다. 살 날이 86일 남았다고 가정한다면 새로운 학생을 받아야 한다는 고민은 현실성 없는 것이지만 수많은 D-100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는데...
살면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느낀 적이 많다. "나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 운명으로 정해진 일이다.", "하늘에 맡겨야 한다." 라면서 상황의 한계라는 이유를 만들어 냈다. 실제로 길에서 전단지와 볼펜을 돌려도 연락은 안 왔다. 디베이트는 팀을 꾸려 와야 진행이 가능한 수업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문의하시는 분들을 엮기도 쉽지 않았다. 꾸준히 한 개의 수업이라도 하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보리라는 기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정말 그게 최선이었나 싶다. 살면서 겪은 다른 모든 일들도 최선이란 걸 다해 본 적이 있나 싶다. 당시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뭔가 아쉬움이 남는 일 투성이다.
'사력을 다한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건 아닐까? 하긴 배워본 적도 없다. 누군가가 가르쳐 준 적도 없다. 그저 "최선을 다 해라."라고 당부만 했지,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삶이란, 무엇이 최선을 다하는 삶인지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최선'따위 관심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도 있지만 사실은 방법을 몰라 무관심한 척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논어 중용 23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진다.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한다는 게... 대체 뭐란 말이냐...
대책 없이 삐딱해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