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키키 키린 )
100일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살면 하루가,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사과를 깎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같은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어머니는 사과를 깎을 때 한 번도 날 먼저 준 적이 없다. 옆에서 침 뚝뚝 흘리며 앉아 있는 나 보란 듯이 제일 먼저 깎은 사과를 당신 입에 먼저 넣으셨다. 그러고 나서 다음 사과 조각을 바로 깎으시는 것이 아니라 한참을 오물거리시며 내 애간장을 태우신 뒤 깎으셨다. 오랜 기다림의 무안함을 겪은 후에야 한 조각 얻어먹을 수 있었던 거다. 내 기억에 엄마의 젊은 시절은 그랬다. 자식이나 가족보다는 자기 자신과 남이 우선인 듯 보였다. 빵집을 하는 친구를 도와 알바를 할 때도 자신이 주인인 양 열과 성을 다하셨다. 명절이고 제사고 할 것 없이, 엄마가 신경 쓰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어떻게 될 것처럼 도와주셨다. 덕분에 나와 동생은 엄마가 시키고 간 일들을 해놓고 기다려야 했다. 가정 형편에 도움되기 위한 목적이 컸겠지만 늘 지인들의 일을 도와주시거나 오지랖을 피시느라 우린 뒷전이었다고 여겨졌다.
그런 엄마가 오늘 나에게 사과를 깎자마자 먼저 먹으라고 내미셨다. 얼떨결에 받아먹으며 다음 사과 조각을 깎는 엄마를 옆에서 보았다. 앙상하게 마른 팔다리, 하얗게 쇤 머리... 이렇게 늙은 엄마를 훑어보는데 또 한 번 훅 들어온다.
"요즘 두 아들 입시 때문에 힘들지? 하루하루가 얼마나 바짝바짝 타들어갈까?"
왈칵 쏟아지는 걸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나? 내 얼굴에 깊은 수심이 쓰여있나?
마지막 한방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하다가 큰딸 와서 이렇게 얘기하니 너무 좋다~"
엄마는 많이 늙어 있었다. 왜 나는 나이 먹어도 엄마는 그저 그대로인 줄 알았을까? 25년의 나이 차이는 매년 같은 보폭으로 흘러온 것인데 왜 엄마가 할머니가 됐다는 걸 몰랐을까?
"친구들 다 소용없다, 나이 드니 내 가족이 젤 소중하다"를 입버릇처럼 말하는 엄말 보면 평생 바람피우고 돌아댕기다 조강지처 찾아와 정착한 지아비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친구들만 챙기더니...
부모가 원하는 효도란 큰 게 아니다. 비행기 태워 해외여행을 시켜드린다거나 명품백을 해 드려도 좋아하시지만 고독함을 느끼지 않게 이야기 들어드릴 때 가장 행복해 보이신다. 별 얘기도 아니다. 눈이 침침하고 눈물이 계속 흐른다던지, 손목이 아파 한숨도 못 잤다든지, 새로 생긴 마트에 갔더니 감자가 너무 싸서 많이 샀는데 좀 가져가라던지, 모임에 가서 남은 음식을 가져오려고 싸놨는데 다른 친구가 홀딱 가져갔다든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다. 그 얘기에 "어머", "진짜?", "헐~" 같은 리액션을 반복만 해줘도 흥겹게 이야기를 하신다. 그 쉬운걸 내 자식 챙긴다고 못하고 있으니...
D-100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정리할 건 '사람'뿐이라는 생각이다. 사랑했던 사람, 죽기 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 사과하고 싶은 사람, 함께 여행 가고 싶은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올 가을이 끝나기 전에, 엄마랑 여행이라도 한 번 갈 수 있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