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시간은 다시 2020년 2월 말로 회귀했다.
적어도 우리 동네는 그랬다.
지역 고등학교 두 곳에서의 확진자 발생으로 자정을 넘은 시각까지 휴대폰은 들썩였다. 포털 실검에 두 학교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근거 없는 소문들의 진위 파악을 요청하는 학부모들의 톡이 쇄도했다. '실례를 무릅쓰고'라는 말을 서두로 학교 선생님께 문의를 드리고 여기저기 소문의 출처를 확인해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은 없었다. 추가 확진자가 몇 명 나왔네, 선생님이 감염됐네 등의 뜬소문과 학교가 무언가 숨기는 것 같다는 음모론까지... 상황이 펼쳐지는 양상은 집단의 규모가 크건 작건 똑같음을 실감했다. 결국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은 거였다. '정보의 부재'는 '상상'을 낳고 거기에 '언어'가 더해지면서 '뒷담화'가 생기는 것은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도 언급했던 사피엔스의 특성 그대로였다.
여기에 한 가지 특성을 더 추가하려 한다.
내로남불.
정치권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본 뜻은 '자신이 하는 외도는 사랑이나 남이 하는 외도는 불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중잣대, 위선적인 사고를 뜻한다.
확진자의 동선을 눈으로 좇는다.
"OO영화관, OO카페, OO음식점. 많이도 돌아다녔네." 라며 혀를 찬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같은 동선을 갖고 있다. 주말이면 외식을 다니고 교외로 나가 차를 마신다. 이제 슬슬 영화도 보러 다니고 쇼핑도 간다. 하지만 자신의 동선은 괜찮다. 확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확진자가 되면 일거수일투족이 지탄의 대상이 되지만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면 괜찮다는 것.
누군가가 확진자로 확정되는 순간 그의 동선과 나의 동선은 다른 차원의 일인 것처럼 선긋기를 시도하는 것.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사자성어, 아시타비(我是他非)의 정석이다.
한때 코로나 19의 증상 중 하나가 역마살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돈 적이 있다. 동선을 보면 하나같이 많이도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 동안 '자택 거주'의 동선을 보인 확진자가 나타나면 찬사를 보낸다. 흉흉한 시국에 진득하니 집에 있었음을 칭송한다.
같은 잣대를 우리 모두에게 대보자. 각자의 형편과 사정을 이야기하며 변명하기 바쁠 터이다.
아이 학원은 뺄 수없어서...
어차피 회사도 다니니까...
아이들이 너무 답답해해서...
진짜 오래간만에 큰맘 먹고...
후딱 다녀온거라서...
마스크 끼고 필요한 것만 얼른...
다른 사람 없는 시간에...
길어지는 팬데믹으로 이제는 바이러스보다 '좀 쑤심'이 더 큰 공포로 다가온듯하다. 거기다 길어진 장마에 집 앞 산책마저 쉽지 않은 상황이라서 집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어디든 나가고 싶다. 그런 시점에 눈에 들어온 확진자들의 활기찬 동선.
비난의 이면에는 부러움이 내포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오늘의 Topic은...
< 내로남불은 인간의 본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