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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20. 2020

난 단지 글을 썼을 뿐이고...

얼마 전 메일 한통을 받았다.

모 잡지사의 작가님이 보내신 메일에는, 브런치에 올렸던 내 글을 읽었으며 글의 주인공이었던 어머니를 취재하고 싶다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참 신기했다.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글 속의 주인공이 궁금해 취재를 하고 싶다는 것은 더더욱.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당황스러움과 궁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어머니는 색다른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사실, 단순한 인터뷰는 아니었다. < 할머니의 부엌 수업 >이라는 제목으로 의미 있거나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을 준비해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메뉴를 두고 며칠을 고민하셨다. 당신에게 의미 있는 음식을 찾아내기 위해 세월을 거스르고 기억을 더듬어 찾아다닌 끝에 결국 세 가지 음식을 결정하셨다.


음식을 결정한 후 재료 구입부터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셨다. 인터뷰 전날엔 손님맞이 집안 청소를 하셨다. 밤잠을 못 이루며 기다린 인터뷰 당일, 잠과 맞바꾼 시간 덕분에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 놓으셨고 머리에는 분홍색 롤까지 말고 계셨다. 평소답게 있어야지 과하게 치장하고 싶지는 않다시며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도 안 하셨다. 편하게 사진 찍고 편하게 말할 거라고는 하셨지만 지원군으로 등장한 딸들 앞에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셨다.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방문하신 작가님과 촬영기사님께서는 능수능란하게 인터뷰와 촬영을 진행하셨다. 작가님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시는 어머님과 모녀처럼 도란도란 얘기하시며 수첩에 들은 내용을 적으셨고 촬영기사님은 테이블에 세팅된 음식을 정성스레 촬영하셨다. 덕분에 긴장도 풀리고 표정도 자연스러워진 어머니는 단독 샷 촬영까지 성공적으로 끝마치셨다.


어머니가 준비하신 음식은 '월남쌈, 동태감자고로케, 쑥개떡' 이렇게 세 가지였다.

30년 전 처음 갔던 미국 여행에서 친지들이 해 드시던 것을 배워와 지인들에게 만들어주던 월남쌈. 미국에서 직접 사 온 피시소스를 사용해 레몬, 청양고추, 양파, 마늘을 곁들여 만들어내는 엄마표 특제 소스에 대한 부심이 가득한 음식이다. 베트남 음식점이 없던 시절부터 우리 집은 월남쌈을 해 먹었노라 자랑하실 때는 "우리 집에 미제 초콜릿 있다~~"라고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동태감자고로케는 나도 잊고 있던 추억의 음식이었다. 결혼 전까지 엄마가 주야장천 해주던 간식이자 별미요리였다. 찐 동태에서 살을 발라내고 삶은 감자, 당근과 섞어 타원형으로 만든 뒤 밀가루, 계란,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음식인데, 타르타르소스에 찍어먹으면 앉은자리에서 몇 개를 해치울 수 있었다.

쑥개떡은 아직도 수시로 해 드시는 음식이다. 봄에 캔 쑥을 쌀과 함께 빻아 냉동실에 준비해두고 일 년 내내 만들어 드시는 떡. 깨나 밤을 넣은 쑥 송편도 엄마만의 노하우로 재탄생한다. 작가님께서 내게 연락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글의 소재이기도 한 음식이다.


작가님은, 기존의 할머님들은 전통 한식 요리를 선보이셨는데 어머니 메뉴는 특이하다며 시종일관 맛있다고 치켜세워주셨다. '할머니 요리'하면 생각나는 메뉴가 아니어서 아쉬우셨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우리 어머니는 늘 새로운 요리에 도전했던 분이기는 했다. 어머니 요리 중에 뭐가 제일 생각나시냐는 물음에도 청국장이나 된장찌개, 나물 같은 음식보다는 쑥찐빵, 고로케, 카스텔라 같은 것들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인터뷰 내내 어머니의 얘기를 듣노라니, 엄마는 시종일관 우리 입에 뭘 만들어 먹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품점 하는 올케, 미용실 하는 올케를 도와 일을 다니던 시절도 있었지만 한 번도 밖에서 파는 음식을 먹이거나 대충 끼니를 챙겨준 적이 없었다. 건설업 하시는 아버지를 도와 준공식 고사상을 차리고 현장 인부들 밥과 새참까지 챙겨야 하던 때도 있었다.

'하나를 먹어도 제대로 먹어야지!'라는 신념으로 소스나 음식의 구색까지 디테일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차려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밥 차리는 일만 해왔을 뿐인데 그걸로 잡지 인터뷰까지 하는 날이 오게 된 것에 감개무량해하신 어머니. 늙어가는 것도 서럽고, 할 일이 없이 TV만 보는 것도 우울하고, 몸이 병들고 아픈 것도 무섭던 요즘이었는데 신나는 일 하나 생겨 요 며칠 즐거우셨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났어도 흥분을 가라앉히시지 못하고 집에 가려는 날 붙잡아 두 시간이나 떠드실 만큼 들떠하셨다. 그러더니 "나도 글을 써볼까 봐~"라며 희망에 가득 찬 말을 던지셨다.

"그래요~ 써봐요~ 처음이 어렵지 쓰다 보면 쓸거리들이 막 보이고 자꾸 쓰고 싶어지지~ "

그렇게 성의 없이 대꾸해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는 그런 분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구, 꽹과리, 통기타, 청소년 상담, 한국무용, 재즈댄스 등등 한시도 가만히 못 있고 무언가를 배우던 분. 집에서도 가만히 못 있고 뭔가를 만들던 분. 속상한 맘이 있을 땐 딸과 편지로 소통하던 분. 반장하는 딸들 덕에 학교일 한다며 내심 좋아하던 분.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던 분이셨다.

열정은 그대로인데 따라주지 못하는 몸과 지루한 환경에 나날이 사그라들던 마음, 그 적적한 마음에 불씨를 당긴 인터뷰였다.


엄마가 그저 부지런히 밥을 하고 상을 차려내던 것처럼, 난 그저 열심히 글을 썼을 뿐이었다.

엄마의 밥을 먹고 세상에 나가 열심히 배우고 놀고 성장한 나였으니, 나의 글로 엄마가 다시 세상을 마주하고 열심히 배우고 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동시에, 그렇게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냉장고에 붙어있던, 인터뷰 음식 준비 리스트.

https://brunch.co.kr/@yjjy03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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