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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12. 2020

무거운 거 옮기는 건 여자가...?

이사를 자주 다녔다면 발병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동네도, 집도 바뀌고 방도, 가구 배치도 핑계 낌에 바꿀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15년 하고도 3개월째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내게 이따금씩 도지는 병이 있다. 일명 '집지루병'

동네 위치나 20층 우리 집의 전망은 이사를 고려하던 마음을 접기에 충분하다. 동네에도 집에도 정이 함뿍 들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얼마 동안은 온 식구가 무의식 중에 이 집으로 퇴근, 귀가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구들도 지겹고 그 지겨운 가구 속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거나 그 속에 몸을 던지는 나도 지겨운 날이 있다. 낡아서 손쓸 곳 많은 집도 지겹고 어디서부터 손 대야 하는지 고민하는 나도 지겨운 날. 그럴 땐 벌떡 일어나 청소기를 들고 진군한다. 짧은 복도 끝에 있는 큰아이방부터 시작해 맞은편 끝에 있는 안방에 이르기까지 청소로 가장한 가구 배치 바꾸기에 돌입한다.


방문 앞에 서서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다시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쭉 둘러본다. 두 평 겨우 넘는 방이건만 그 안에 뭔 짐은 그리 들어찼는지... 찬찬히 들여다봐도 버릴 건 없다. 배치를 조금 바꿔준다면 더 효율적이고 쾌적한 환경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1,2년에 한 번씩 한다.)

의자, 선풍기 등의 자질구레한 짐은 마루로 잠깐 빼놓고 자리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침대의 위치부터 정한다. 침대 위치만 결정되면 책상, 책장, 서랍장, 행거의 위치는 자동으로 정해진다. 벽에 붙이는 단순한 배치만 가능하지만 아무튼 요리저리 가구를 조심스레 옮기면서 가구가 난 자리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까지 사부작사부작한다. 책상 위에 너저분한 것들도 한꺼번에 싹 정리하고 서랍이란 서랍도 다 엎어 닦아가며 정리한다. 헹거에 걸려있는 게 아니라 쌓여있는 옷들도(어제 걸었어도 다시 쌓여있는...) 다시 걸어준다. 새집에 이사 온 기분이 드는 방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음 방으로 이동!


지난 15년간 이런 행위를 여러 번 시도했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안방 맞은편 방을 아이들 침실로 꾸며주고 복도 끝 두방 중 하나는 TV 방으로, 하나는 아이들 놀이방으로 꾸며주었다. 거실은 책장과 소파만 두어 학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유행에 동참했었다. 우리 아이들은, 유행 따위나 따르고 엄마가 세팅한 대로 착실히 책 읽는 아이들은 아니었다. 책으로 징검다리를 만들어 마루를 휘젓고 다니고 주로 TV 방에 콕 박혀있었다. 그래서 몇 년 만에 다시 전통적인 마루를 복원시켰다.

특별히 거실용으로 짜 맞췄던 책장을 방으로 옮기고, TV 방에 있던 거실장과 TV를 마루로 꺼내왔다.


아이들 침실이었던 안방 맞은편 방은 TV 방으로 쓰였다가 책방으로, 컴퓨터실로, 내 육포 건조방으로, 다시 컴퓨터방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맞이했다. 복도 끝에 나란히 붙은 두 방중 하나는 아이들 놀이방, 하나는 TV 방으로 쓰였다가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하나는 공부방 다른 하나는 침실로 나누었다. 그러다가 큰아이의 사춘기 시작과 함께 방을 분리해주고 고3, 중3이었던 작년 다시 한번 합방을 해주었다. 그렇게 하면 공부방에서 공부에 집중하고 잠은 침대방에서 푹 잘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은 늘 침대방에서만 생활했다... 그것 때문에 큰아이가 수능을 망치고 작은아이가 지원한 고등학교에 떨어진 건 아니겠지? 결국 작년 말 다시 두 아이 각자 방으로 분리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1년이 채 안돼서 방 배치를 또 바꾼 셈이네? 심심하긴 무지 심심했나 보다.


방끼리 역할을 교환한 것뿐만 아니라 방 안에서도 여러 시도를 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님 방처럼 방 중간에 책상을 배치해준 적이 있었다. 방문을 열면 공부를 하는 아이의 얼굴이 정면에 보이고 뒤로는 창문 넘어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책상 앞에는 침대를 배치했다. 침대에 누으려면 책상을 반 바퀴 돌고 침대를 빙 돌아야 했다. 일단 공부를 시작하면 침대로 가는 일이 험난한 여정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럴듯해 보였지만 문제점은 금세 드러났다. 침대에 일단 누우면 책상으로 가는 여정 역시 쉽게 포기한다는 것...

그 이후로는 가구를 벽에 붙이는 단순하고 깔끔한 배치를 고수했다. 그래 봤자 창과 문이 있는 벽면을 제외하면 두면밖에 안되지만 조금만 달리해도 가족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와~ 방이 훨씬 넓어 보이네?"

이번에 바꾼 방 배치
작년 한 해동안 아이들 방을 공부방과 침대방으로 나누었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야한다며 침대 사이에 헹거로 가림막을 만들었다.


혹자는 궁금할지 모르겠다.

질문 1

'집에 장정 셋을 두고 왜 혼자서 고생을 하지?'

장정은 셋이 있으나 그들은 '변화'에 관심도 없고 번거로운 작업을 좋아하지 않는다. 같이 옮기자고 한다면 마지못해 해주기야 하겠지만, 엉뚱한 곳에 짜증을 부림으로써 나로 하여금 한껏 눈치를 보게 할 것이 뻔하다.

질문 2

'방주인은 원하지 않는데 맘대로 그리 바꿔도 되나?'

방주인들은 방에 기거는 하지만 청소도 안 하고 정리는 더더욱 안 한다. 그러니 청소와 정리를 일임하는 내게 방 배치 변경의 권한도 위임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질문 3

'지루하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있다. 방 구조를 자주 바꿔준 아이일수록 창의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기때문... 믿거나 말거나...

질문 4

'안 힘드냐!'

힘들다. 혼자서 무거운 책장을 이방 저방으로 옮기고 나면 며칠 동안 삭신이 쑤신다. 하지만 기분전환도 되고 덕분에 정리도 한 번씩 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멈추질 못하겠다.


예전에 한 지인은 "난 결혼하고 글씨 쓰는 법을 까먹었어~ 학교에 내는 신청서든 뭐든 남편이 다 써주거든~ 호호호호~ 이젠 손에 펜 드는 것도 힘들어~"라며 자랑하듯 말하던 기억이 난다. 글씨 쓰는 법을 까먹기는커녕, 난... 시골에서 온 쌀 20kg을 쌀 항아리에 옮길 줄도 알고 원목으로 튼튼하게 만든 책장을 바닥에 수건 깔아가며 밀고 당겨 옮길 수도 있다.

"유떵이 이거 모태여. 그대떠 디금까디 기다디고 이떠떠여~"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삶을 살지는 않겠다는 다짐이... 오늘의 억척스러운 근육을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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