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이 점점 부실해진다.
살림 경력 20년이면 눈감고도 밥상을 차려내야 하거늘 어떻게 된 게 끼니때마다 반찬 걱정을 하고 차려내고 보면 그날이 그날이다. 지인들과 얘기해봐도 그 집이 그 집이다. 반찬가게에 들어갔다가도 허탈한 발걸음을 돌려 나온다. 계란말이, 어묵볶음, 멸치볶음, 진미채 무침 등등 매일 해 먹는 반찬이 거기에도 있다. 게다가 한 접시 거리를 살 돈이면 온 식구가 실컷 먹을 양이 나오니 돈이 아까운 측면도 있다. 직장맘이었다면 반찬 할 시간을 아끼게 해 주니 얼마든 지출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전업주부 입장에서 반찬가게 이용은 마음도 지갑도 열기가 쉽지 않다.
아이디어 고갈로 허덕일 때쯤 구세주처럼 나타나는 메뉴들이 있다. 지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맛본 특이한 반찬이나 가족들과의 외식에서 아이들이 걸신들린 듯 먹어치운 밑반찬들이 그것이다.
"오~ 이거 괜찮네. 맛도 좋고 특이하고~"
이렇게 입을 모아 극찬을 하면 잘 기억해 두었다가 언젠가 꼭 상에 올려본다.
톳 두부무침, 고구마순 들깨 무침, 머위나물, 마카로니 샐러드 등.
분명히 음식점에서는 열심히 리필해 가며 먹던 반찬들인데 집에서는 젓가락질이 시원찮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하라는 대로 만들었고 맛도 특별히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나 역시도 그저 그렇다. 남편은 미원이 안 들어가서 그런 거라고 하고 아이들은 거기 가서 먹어야 맛있다고 한다. 조미료의 문제, 장소의 문제로 돌리지만 결국 그 맛을 구현해내지 못한 것일 테다.
그렇게 한번 외면당한 반찬은 미안하게도 다시 사랑받기 힘들다. 만든 나 자신의 성의를 생각해 꾸역꾸역 먹어보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냉장고에서 며칠을 뒹굴며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다 결국 음식물 쓰레기통을 향하게 된다.
순전히 내가 먹고 싶어서 만든 반찬 역시 그렇게 뒹굴다 버려지기 일쑤다.
쫀득쫀득하면서도 아삭한 식감에 단짠단짠의 조화가 매력적인 연근조림과 기름에 마늘과 함께 볶으면 별다른 양념 없이도 맛난 미역줄기, 남은 양념에 밥 비벼 먹으면 간장게장 저리 가라 할 밥도둑인 콩자반.
어렸을 때는 입에도 안 대던 반찬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먹고 싶은 이 조화는 뭘까. 나이 들고 있음을 이렇게 달라진 입맛에서 팍팍 드러내고 있다.
반찬 가짓수도 늘릴 겸 만들고 나면 역시나 내 젓가락질만 바쁜 반찬이 된다. 작은 종지에 식구들마다 1인분씩 할당해주면 마지못해 먹긴 하지만, 급기야는 '그냥 버리기는 아까우니 빨리 쉬어버려라!'라는 마음까지 품게 만든다. 풀이 죽어버린 그네들을 버리면서 죄스러운 마음에 다짐, 또 다짐을 한다.
"안 먹는 반찬은 하지를 말아야지. 뭣하러 공들여 만들어 놓고는 이렇게 다 버린다니? 입에 맞는 반찬이나 해주고 말지. 제발 생각 좀 하고 장을 보자!"
시간이 흘러 흘러, 반찬 고민의 쳇바퀴에 갇히다 보면 어느새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기억상실증을 가진 주인공의 복수극을 다룬 스릴러 영화 '메멘토'의 후속작 < 메멘토 키친 >이라도 찍으려는 건가. 메멘토보다 더 잔혹한 영화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20년간 반복된 기억상실과 덕분에 실려나간 반찬들의 이야기는 영화 같은 반전도 없고 결말도 없지만 앞으로도 수십 년간 계속될 기억상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잔인하다.
한상 가득 반찬이 나오는 한정식집을 다녀오는 길에 장을 보며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
아까 먹었던 나물이 뭐였지? 아! 산상추? 오늘은 그걸 한번 사서 해봐야겠다.
오래간만에 연근을 조려볼까? 어머 톳이 있네? 데쳐서 두부랑 조물조물 무쳐볼까?
제발 좀...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